세상을 인식하는 거리
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를 좋아한다. 아마 10번은 넘게 본 것 같다. 1편 『배트맨 비긴즈』에서 브루스 웨인의 부모를 죽인 범죄자 칠은 뒷 세계의 보스 팔코니의 비밀을 증언하는 대가로 가석방을 약속받는다. 하지만 칠은 재판이 끝나자마자 브루스가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화가 난 브루스는 팔코니를 찾아간다. 브루스는 팔코니에게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팔코니는 브루스를 그저 조롱할 뿐이다.
“난 경찰이 보는 앞에서 당장 너를 죽일 수도 있어. 그런 힘은 돈으로 못 사. 공포의 힘이거든.”
“넌 잃을 게 없다고 말하지만, 너의 여자 친구 검사와 늙은 집사가 있지 않나. 넌 이 세계를 몰라. 이해할 수 없는 건 두려운 법이지.”
팔코니는 죽은 브루스의 부모까지 조롱하며 그를 내쫓는다. 흠씬 두들겨 맞고 쫓겨난 브루스는 자신의 비싼 코트와 노숙자의 재킷을 바꿔 입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이내 깨달음을 얻은 듯, 브루스가 막 출발하는 배에 충동적으로 올라타며 영화가 시작된다. 범죄자를 이해하기 위해선 직접 범죄자가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채로.
‘이해할 수 없는 건 두려운 법이다’라는 말은 공포라는 감정의 본질을 담고 있다. 마피아 보스인 팔코니가 그걸 공부해서 안 것은 아니겠지만, 심리치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무의식 깊은 곳에 숨겨진 부정적 감정을 의식의 세계로 끌어와서 마주하는 것이 치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인지심리학자들이 항상 말하는 것이 있다.
‘인지하지 못하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마음 깊이 숨어 있는 감정과 생각들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무의식의 깊은 곳 어딘가에서, 억압된 우리의 야만성은 우리의 마음을 갉아먹고 불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자각하기는 힘들다. 융은 그것들을 ‘그림자’라고 불렀다. 융의 정신분석학에서, 그림자는 우리가 숨기고 싶은 욕망과 공격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출발점이다. 반면 현대의 인지심리학은 무의식이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인지하고 그것들을 교정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인지심리학은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다. 지금까지 도덕 심리학과 도덕 매트릭스, 가정 모델 같은 개념을 설명했던 건 보수와 진보의 도덕적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설명한 것들이다. 하지만 학계에서 정립된 이론과 사실들은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특정 관점에서만 설명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보수와 진보를 이해하는 단일한 기준은 없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번 장에서는 학문적 근거와 이론은 잠시 내려놓고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인지거리라는 개념으로 시각화하여 최대한 쉽게 이해하는 것이 목표이다. 인지거리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되면 자동으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왜 다른 공감능력 세계관을 가지는지 이해할 수 있다. 보수와 진보의 특징이 왜 현실에서는 모순되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인지거리라는 개념은 실체적 현상이라기보다는 이해를 위한 설명적 도구일 뿐이다. 그 자체로는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정치적 관점과 행동이 다 다르다. 하지만 사람들의 정치적 성향과 개성을 무시해야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래서 설명이 다소 극단적일 수 있다.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인지거리란 내가 유의미하게 경험하는 인식의 거리이자, 내가 실제로 삶에서 신경 쓰고 고려하는 세상의 크기다. 지구에 약 70억 명의 사람이 살고 그 안에서 수많은 일들이 벌어진다고 해서 내가 그것들을 전부 신경 쓰지는 않는 것처럼, 우리의 뇌는 필터를 거치기 때문에 실제 내가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세상의 크기는 그렇게 넓지 않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한계는 정해져 있다. 살면서 수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더라도 우리는 그중 아주 일부만을 받아들여 판단하고 고려하는 대상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내가 사는 세상인가’라는 질문은 곧 ‘어디까지 고려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예를 들어, 지구 반대편에서 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건물이 부서졌다는 뉴스를 볼 때 잠시 안타까움을 느끼더라도 곧 잊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적인 인식 범위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상의 한계를 벗어나기가 힘들다.
이를 바꿔 말하면,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이 더 클수록, 더 멀리까지 고려한다는 점이 된다. 반대로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크기가 좁을수록, 더 좁게 고려하고 그 밖의 세상은 신경 쓰지 않게 된다. ‘인식하는 세상의 크기’는 어느 정도까지는 선천적으로 결정되고(편도체와 전두엽 같은 뇌 구조 차이, 도파민과 테스토스테론 같은 호르몬의 차이로 인해), 나머지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정치는 선천적으로 다른 뇌를 가진 보수가 진보가 환경적 요인을 바꾸기 위한 투쟁이다. 그 결과로 사람들의 인지거리는 후천적으로도 좁아지거나 넓어진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는 어느 정도까지는 타고난 ‘무의식적인 인지거리’가 다르고, 그 인지거리에 걸맞은 삶을 살고 또 그에 걸맞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인지거리라는 개념을 이해하면 민감한 이슈에 대해 보수와 진보가 왜 다른 태도를 가지고 특정 이념에 끌리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보수는 무의식적 인지거리가 짧아 세상을 좁게 보고, 진보는 인지거리가 길어 세상을 넓게 본다. 보수는 관심을 가지거나 신경 쓰는 범위가 좁아 자신과 자신의 가족, 국가, 이해집단 같이 좁은 범위까지만 신경을 쓰고 그 외 세상은 신경 쓰지 않는다. 반면 진보는 가족, 국가를 넘어서서 인류, 동물, 환경 같이 넓은 범위까지 관심을 가진다. 결과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인식체계는 완전히 달라지고, 세상을 이해하는 틀인 프레임이 달라진다. 인간은 프레임에 어울리는 동기화된 추론을 거쳐 정보를 해석하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인지거리가 달라지면 우리가 보고 느끼는 세상이 달라진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진보는 보수를 ‘이기주의자’라고 욕하고, 보수는 진보를 ‘위선자’라고 욕한다. 인지거리가 긴 진보주의자는 사회 전체, 특히 약자를 더 배려하는 것이 당연한데, 자신과 자신의 집단만 신경 쓰는 보수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인지거리가 짧은 보수는 나와 내 주변까지만 신경 쓰는 것이 당연한데, 그 너머 막연한 인류라는 개념을 위해 자기 이익을 양보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그 의도를 의심하게 된다. 진보주의자가가 평등, 인권, 정의를 부르짖고 사회 운동을 하는 것은 보수에게는 권력을 차지하거나 이익을 얻으려는 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동기화된 추론을 거쳐 친문 패권주의, 강남 좌파 같은 말들을 만들어 낸다. 사실 본인들이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니(인지적 당연함 때문에), 남들도 그럴 거라고 예상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보수주의자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측은지심에 기반한 진보의 정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인지거리와 인식체계의 차이를 지능, 인성 같이 능력이나 윤리의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인지거리가 개인의 지능과 인성에 부분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체는 생물학적이고 유전적인 사실일 뿐이다. 개인의 차이를 무시하고 일반화할 문제는 아니다. 결국 정신 에너지를 어디까지 분배할지와 관련된 선택과 집중의 문제가 인지거리의 차이를 만든 것뿐이다. 이미 생활사 전략을 통해 우리의 조상들이 특정 환경 속에서 어떤 전략을 취하도록 자연선택되었는지 알아보았기 때문에, 인지거리라는 개념을 우월성의 징표로 삼는 사람들이 없기를 바란다.
내가 즐겨 보는 유튜브 채널 중에선 망해가는 음식점을 컨설팅해주는 채널이 있다. ‘유튜브판 백종원’이라 부르는 분인데, 어릴 적부터 장사를 시작해 고생 끝에 치킨집 프랜차이즈화에 성공해 200억에 매각한, ‘장사의 신’이라 불릴 만한 사람이다. 맛은 있지만 장사가 잘 안 되는 가게의 마케팅과 장사 마인드를 주로 컨설팅해주고 있다. ‘음식이 맛있다고 장사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영리하게 장사를 해야 하고 고객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장사도 센스다’는 조언을 해주며, 초보 사장님들이 스스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다. 음식 장사도 결국 사업이다. ‘장사의 신’ 채널에 컨설팅을 문의했던 사장님들은 요리의 맛에만 집중했을 뿐, 궁극적인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라는 점을 간과한 셈이다. 물론 그 점을 명심하더라도 장사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요식업 폐업률이 2021년 82.7%라는 수치는 창업 준비가 부족한 가게가 많다는 것을 방증하는 통계다. 백종원 대표도 '음식점 창업을 하려면 충분히 고민하고 준비하라'라고 한 말은,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일 것이다. 음식의 맛, 가게 분위기, 재료의 퀄리티, 마케팅, 손님 접대, 상권 분석 같은 것들은 돈을 벌기 위한 부차적인 문제, 즉 현상일 뿐이다. 결국 장사의 본질은 마진을 남겨 돈을 버는 것이다. '장사'라는 본질에 집중하면, 음식을 팔든, 술을 팔든, 자동차를 팔든 간에 차이가 없다. 그래서 현상 너머의 본질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피상적인 현상, 눈에 보이는 것 그 이면의 진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인 문제에 매몰된다. 이를 ‘인지거리’ 관점에서 보면, ‘요리의 퀄리티’라는 현상까지 밖에 보지 못하는 사장은 마케팅, 상권, 고객만족 같이 다른 현상을 고려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 본질적인 문제, 이익을 남기는 것에 집중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고집까지 세서 남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장사로 성공한 사람이 아무리 컨설팅을 해줘도 자신의 경험과 생각 너머의 인지거리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도움은 받고 싶지만 변하기는 싫은 사람들의 심리가 그렇다. 인지거리 밖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가지고 자꾸 뭐라고 하니 우선 기분이 나쁘고, 그 불쾌한 기분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의식에서 탓할 대상을 만들어 낸다. [백종원의 골목식당] 속 빌런들이 이런 예다. 본인이 도움을 청해서 성심성의껏 솔루션을 해줬더니, 자기를 망치려 했다는 식으로 뒷담화를 하는 빌런들의 심리가 바로 인지거리의 한계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수는 짧은 인지거리를 가지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그 범위 내의 세상에서만 살아가려 한다. 보수주의자는 인지적으로 당연한 경계 그 너머로 발을 디딜 의지가 없다. 그래서 경계 밖의 정보는 자신의 인지 범위 내에 맞도록 재해석하여 받아들인다. 결국 동기화된 추론을 거쳐서 보고 싶은 대로 보는 ‘확증편향’과 ‘인지부조화’ 같은 인지적 오류가 진보주의자들보다 빈번하게 일어나, 하나의 도그마(독단적 신념)를 형성한다. 진보주의자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면, 자기 세상에선 그게 당연하지 않으니 불쾌한 감정이 들고,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 포퓰리즘, 위선자라고 믿는 식이다. 진보정권이 UN 회원국 모두가 하는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을 하면 (당연히 보수정권도 매년 지원하지만, 자신의 신념에 부합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한다.) 친북좌파가 북에 퍼준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보수주의자는 대개 인지거리 영역 밖의 요인들이 미치는 영향력과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적 문제임이 명확해도 모든 걸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근본적 귀인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이 자주 하는 말이 ‘개인의 책임’이다. 하지만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경우는 없다. 인식의 초점이 자기 자신에 맞춰져 있으니, 잘 되면 내가 잘해서 그런 거고, 안 되면 남 탓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내기 때문이다.
인지거리가 짧으면, 그 범위 내의 대상들에 대해 더 공감하고, 더 애정을 가지게 된다. 이를 바꿔 생각해 보면, 인지거리 내의 대상을 향해선 더 집착하거나 맹신한다는 뜻이 된다. 사람이 투입할 수 있는 감정과 인지능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범위가 좁아지면 상대적으로 인지거리 내의 대상들에 대한 공감과 인식의 강도가 더 세지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이 남의 자식에는 냉정해도 자기 자식에는 죽고 못 살거나, 경쟁 국가에는 적대적이면서도 애국심이 넘치는 것도 좁은 인지거리 때문이다. 보수주의자의 이타심이 지역주의적인 성격을 띠는 이유다.
물론 공감과 인식의 강도가 가장 강한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인지거리가 짧을수록, 자신이 더 고귀하다는 인식은 더 강해지고 자아에 집착하게 된다. 반대로 인지거리 밖에 있는 타인은 열등하다는 인식이 생겨나서, 서열주의와 위계적 사고방식, 불평등에 대한 합리화가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강한 사람이 곧 옳은 것이고, 약자는 강자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따라야 한다는 권위주의가 나타나게 된다.
자기 집착이 강한 사람은 정당한 외부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어적인 공격성을 띠게 된다. 외부의 대상이 경계를 침입하면 자아가 상처를 입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지거리 밖 세상은 어떤 식으로든 보수주의자의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만, 대개 보수의 인식 범위 밖에 있어서 명확히 지각되지 않아 이해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경험적으로는 알지만, 판단과 고려의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팔코니가 말한 것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무의식의 공포와 불안을 자극한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세상이 정글과 같이 위험한 곳이라고 느끼게 된다. 무의식의 내면에서는 원일 모를 불안이 올라오는데, 그게 모른다. 이해되지 않는 건 두려운 법이니, 갈수록 불안해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그러면서 점차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고, 인지거리가 더 짧아진다. 인지거리가 자기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들,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런 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애성 성격장애, 즉 나르시시스트적인 성향을 보인다. 나르시시스트들의 본성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데 있지 않다. 반대로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인식범위 밖 세상에 발을 내밀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겁이 많아서 그 반작용으로 자기 자신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의 심리도 비슷하다. 보수주의자들은 보통 자존심이 강하고 소유욕이 강하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근원적인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불안을 해소해주는 무언가에 집착한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재물, 능력, 지위, 효용, 명예 등에 집착하고, 정당한 비판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진정한 자존감이란 ‘자기 존재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못난 자기 자신까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포용력’에서 나온다. 따라서 자존감에는 자기의 바닥까지 대면할 수 있는 ‘지성’과 그 바닥을 인정하고 품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자신을 객관화하여 볼 수 있어야 하고, 나와 세상의 관계가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인지거리가 넓어야 하는 이유다. 인지거리가 넓어야 더 멀리, 깊이 본질을 볼 수 있고 세상 속의 나라는 존재를 객관적이고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대시를 많이 받아서 자존감이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자존감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자신감은 항상 ‘외부 요소’를 필요로 하기에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을 만나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타인과의 비교를 필요로 하는 자신감은 생각보다 그 기반이 허약하다. 하지만 자존감은 애초에 가면을 벗은 ‘날 것 그대로의 나’를 재료로 한다. 그래서 외부의 압력이 들어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가난하거나 못생겨도, 능력이 부족해도 충분히 자존감이 높을 수 있단 이야기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항상 외부의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돈, 사회적 지위, 능력, 명예, 사람들의 관심과 칭찬, 아름다움.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소유하는 데 집착한다.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To Be or To Have)』에서 인간의 실존 양식은 소유와 존재로 구성되며, 현대인들은 불안하기 때문에 더욱 소유에 집착한다고 보았다. 현대인들은 행복을 느끼고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존재하기보다 소유하는 쪽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는 자신이 경험하는 세상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다.
보수주의자의 심리도 마찬가지다. 주변이 어두울수록 손에 쥐고 있는 촛불에 더 의지하듯이, 보수 역시 항상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외부 세상으로부터 무언가를 벌어들인다는 인식 체계가 나타난다. 세금과 경제, 평등과 경쟁 같이 돈이 걸린 문제면 보수와 진보는 인식 체계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세금을 예로 들어 보면 그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보수는 세금을 빼앗긴다는 개념으로만 받아들인다. 인지거리가 짧을수록 벌어들인다는 개념은 강해지고 지불한다거나 돌려받는다는 인식은 약해진다. 인지거리 밖의 문제이기 때문에 지각되지 않아서다. 진보는 세금을 내도 인지거리 내에서 이동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세금을 내도 어차피 공공 서비스나 복지로 돌려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세금 인상에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보수주의자의 인식체계에선 오직 이익은 안쪽으로 작용한다. 반면 인지거리 밖으로 나가는 것은 빼앗기는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보수는 세금이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금이란 '내가 정당하게 노력해서 번 돈을 빼앗아가는 것이고, 정부가 내게서 돈을 훔쳐서 게으른 복지 수혜자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준다'는 식으로 밖에 인식이 작동하지 않는다. 오직 중요한 건, 그게 ‘내 돈인가 아닌가’이다. 내 돈이 아니라면 그걸 어떻게 쓰든 상관하지 않는다. 보수가 정권을 잡으면 항상 부패인식지수가 떨어지고, 비효율적인 재정 사용으로 인해 국가 채무가 증가한다. 그런데도 보수주의자들은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지거리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홍종학 의원실에서 발간한 자료를 보면, 역대 정부 재정 적자는 노무현 정부 시절 약 10조, 이명박 정부 시절 약 100조,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약 170조를 기록했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국민의 생계를 지원한다고 하면, 보수 정당과 보수 언론은 재정 적자와 건전성을 언급하며, 전 국민 재난지원금에 대한 부정적 프레임을 짜 놓는다. 보수적 성향의 국민들 역시 복지가 도덕적 해이를 불러온다고 걱정하지만, 막상 공짜로 돈이 들어오면 신나서 받는다. 인식체계가 밖에서 안으로 벌어들이는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돈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진보 정권으로부터 받은 것이지만, 애초에 보수의 인식 체계에서 누가 줬느냐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보수주의자는 세금은 애초에 안 내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재벌이 각종 불법 재산 증여와 회사 쪼개기 같은 편법을 통해 탈세를 저지르고 주주에게 손해를 입혀도, 분노하기보다는 한국의 반기업적인 환경에 대해 걱정한다. 종부세를 낼 처지가 안 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금 폭탄’이라는 기사 제목을 보고 세금을 뜯길까 봐 불안해한다. 세금폭탄이라는 말 자체가 세금으로 두드려 맞는다는 뉘앙스가 내포되어 있어 사람들의 손실 혐오감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보수 정권이 세금을 인상할 때 보수 언론이 ‘재정 건전성 확립’, ‘재정 확보’라는 기사를 내면 사람들은 아무 이의제기도 하지 않는다. 반대로 똑같은 이유로 진보 정권이 세금을 인상하면, 보수 언론은 ‘세금 폭탄’라는 말의 프레임을 만들어 낸다. 똑같은 세금도 빼앗긴다는 느낌이 들도록 언어가 구축되면, 사람들은 실체적 진실과 관계없이 일단 화부터 내고 본다. 자기 인식 범위를 넘어서 진실을 탐구하려는 노력을 하기보단, 순간적인 감정과 느낌에 의존하는 것이 인지적으로 편하기 때문이다.
오직 안쪽으로 벌어들인다는 인식만이 사고의 밑바탕으로 작용하면, 구조적인 문제를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공짜 밥을 먹고 공짜 지하철을 타면서도 복지가 나라를 망친다고 한탄하는 노인들이나, 자식이 50만 원짜리 원룸에서 사는 걸 걱정하면서 부동산 가격이 오른다고 좋아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오직 벌어들인다는 생각만 하기에, 영끌했을 때 금리 상승을 감당해야 하는 문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부동산 거품과 임대료 상승으로 인해 거리의 상권이 망해가고,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고, 일본의 버블이 붕괴할 때보다 높은 가계부채 비율을 기록하는 것이 사실 같은 문제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진보 정권이 터지기 일보직전인 거품을 잡기 위해 부동산을 규제하겠다고 하면, 서민이 돈을 벌지 못하게 하는 무능한 정권이라고 욕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그 비용을 지불할 때가 되면 화를 내거나 투덜거린다. 그리고 진보 정권을 욕한다. 보수주의자는 권위에 순응하기 때문에 애초에 그쪽을 탓할 생각은 하지 못하기도 하고, 사고방식이 내가 돈을 벌게 해주는 곳이 좋은 곳이라는 일차원적인 인식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도 잠시, 보통은 금세 현실에 적응한다. 애초에 어떤 현상을 사회적ㆍ구조적 문제로 바라볼 생각을 못하기도 하고, 내가 다시 잘 벌어들이면 된다는 쪽으로만 인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비교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떨어지기에, 오히려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 정치인은 대중의 낙관주의와 장밋빛 희망 덕분에 손쉽게 권력을 유지한다.
보수주의자의 이익 추구에 대한 욕망은 본능적인 것이라, 직업에서도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보수 인권 변호사, 보수 인권 운동가를 본 적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인권은 인지거리가 긴 진보주의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경제학자와 투자 전문가 같이 벌어들이는 분야에선 보수주의자가 강점을 가진다. 주류 경제학인 시카고학파와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유로운 시장을 옹호하고 규제 철폐를 주장하거나, 윌스트리트가 버블의 위험성은 생각지도 않고 복잡한 파생 금융상품을 만들어 금융위기를 초래한 것도 오로지 벌어들이는 것에만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일반인과 월가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보통 사람들과 달리 월가 직원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어도 돈을 벌겠다고 대답했다.)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 마틴 슈크렐리가 에이즈 치료제의 특허권을 사들인 지 하루 만에 가격을 13.5달러에서 750달러로 5000% 인상한 것도 마찬가지다. 반면 프란츠 칼 아카드라는 사람은 부자들만 먹을 수 있었던 사치품인 설탕을 사탕무로 값싸게 제조하는 법을 발견하자, 이를 특허로 내지 않고 무료로 풀어버렸다. 당시 설탕은 흑인 노예를 이용한 삼각 무역의 한 축이었기에, 영국의 사탕수수 제조자들은 엄청난 돈을 주며 사탕무 제조법을 폐기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아카드는 거절했다. ‘누구나 설탕의 달콤함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이유였다. 이렇듯 인지거리가 극단적으로 짧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죽어도 나만 돈을 벌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인지거리가 긴 사람은 돈보다는 인류의 복지와 행복을 선택한다. 그 대가로 아카드는 파산해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갔지만 말이다.
진보주의자는 보수주의자와 반대로 넓은 인지거리를 가지고 태어난다. 보수주의자가 세상을 좁게 보는 대신에 선명하게 본다면, 진보주의자는 세상을 넓게 보는 대신에 흐릿하게 본다. 그래서 각각의 사물과 현상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지게 된다. 진보주의자가 추상적이고 난해한 언어를 사용하고,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철학적으로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진보주의자들도 이렇게 난해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언어를 자주 쓰는데, 사실 자기도 뭔 말하는지 잘 모른다. 증명되거나 반박될 여지가 있는 언어가 아니거든. 그냥 있어 보여서 쓰는 거다.
‘주체와 객체, 타자와 대타자, 개별성과 전체성, 폭력, 소외, 억압’
조건 없이 난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며, ‘우리 모두 같은 인간이잖아요’
물론 인지거리가 넓으면 장점이 많다. 다양한 현상들의 관계와 본질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다방면에서 정보와 관점들을 고려해 종합적인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창의적인 답이 나올 수도 있다. 창의성은 진보주의자만의 것이다. 창의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려면 우선 자신의 인식 경계를 넘어서서 다르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실패를 용인하고, 이상한 생각이라도 존중하는 관용적인 사회 분위기가 형성돼야 한다. 보수주의자는 다름을 용납하지 않고 인생에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천재가 나오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진보주의자가 자기 장점을 발휘하는 것은 쉽지 않다. 넓은 인지거리에 걸맞은 지식의 깊이를 가지려면 고도의 지적 훈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공부하는 자세지만, 그건 머리 아픈 일이다. 그래서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모호하고 흐릿한 앎에 안주하고 지적 게으름에 굴복한다. 이러한 지적 게으름을 만족시켜주는 게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는 ‘idea’와 ‘logik’의 합성어로서, 세상에 대한 인식 체계 또는 신념 체계를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해석하는 틀, 프레임으로 기능한다. 정치 이데올로기 역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와 진보주의 이데올로기가 있지만, 그 성격은 많이 다르다. 보수 이데올로기는 보수의 원초적 욕망인 이익 추구와 안정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존재한다. 반면 진보주의는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려는 욕구를 정당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진보주의자가 이데올로기에 더 이끌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수주의자에겐 이미 사회적 관습과 예절, 종교, 국가, 돈, 소속 집단 같이 안정과 소속감을 충족시켜주는 것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는 사회의 관성과 전통 너머의 새로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넓은 인식 범위를 단순화하면서도 평등과 연민, 변화와 지식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인지적 틀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회과학 계열의 학자 90% 이상은 진보주의를 지지한다.
무엇보다 이데올로기는 긴 인지거리에 뒤따르는 지식과 공감의 공백을 메꿔주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진보주의자가 저소득층의 가난과 불평등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고 해보자. 생판 모르는 타인의 불행에 대해 그의 연민은 진심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가며 희생할 정도로 가슴 아파할 정돈 아니다. 이때 이데올로기는 긴 인지거리에 뒤따르지 못하는 공감과 지식의 불일치를 해결해 준다. 이미 경제적 불평등의 원인과 구조적 해결책을 윤리적으로 제시하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진보주의자는 이데올로기를 소비함으로써 자신의 지적인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인지거리가 지나치게 길면, 그 사람의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 생각의 깊이가 넓은 인지거리를 따라잡지 못한다. 불평등 문제는 사회적ㆍ경제적 문제이므로, 한국의 양극화가 극심해진 이유를 알려면 우선 한국 경제구조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통시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게다가 다양한 경제 이론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국의 불평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비판에 반박할 수 있다. 전문가 수준이 아니더라도, 경제 뉴스를 이해하고 토론할 수 있는 경제적 상식은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야 엄밀히 말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선결 과제가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긴 인지거리에 걸맞은 능력을 갖춘다는 건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픈 일이다. 이럴 때 이데올로기는 인지거리와 지식의 불일치를 해결해 준다. ‘약자에 대한 기득권의 폭력’, ‘평등과 인권 보호’라는 말 같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를 도덕과 윤리의 문제로 치환해버리는 것이다. 아주 쉽고 단순한 방법이다. 이런 말들은 지극히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라 아무런 무게도 가지지 못하는 말이지만, 이미 도덕적 우위가 은밀하게 담보되어 있기에 사람들은 그 모호성에 쉽게 넘어가곤 한다.
이렇게 추상적이고 모호한 언어를 사용하면 현실에 대한 부족한 지식과 이해를 감출 수 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항상 구체적인 사례와 전문적인 설명을 곁들이기보다는 난해한 이론과 논리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진보주의자들이 시위나 집회, 트위터에서 하는 말들을 살펴보면 죄다 이런 식이다.
‘평등’ ‘연대’ ‘혐오’ ‘차별’ ‘정의’ ‘억압’
설득의 책임은 말을 하는 당사자에게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증명될 수도 없고 반박할 수도 없는 언어를 사용해 주장에 대해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할 의무를 면피하는 것은 명백히 비겁한 짓이다. 그건 정치 성향의 차이이기 이전에 인간 대 인간, 시민 대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다. 인지거리가 짧은 보수는 항상 현실에 발을 담그고 있는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언어의 진실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보수가 진보보다 솔직한 셈이다. 반면에 진보는 인지거리가 너무 길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과 원론적인 말만 늘어놓는다. 진보의 세계관과 인지적 당연함 때문이지만, 같은 진보주의자로서 나는 이 점에 특히 불만이다. 그런 식으론 대중에게 진보적 가치를 설득하고 공감하게 할 수 없다.
진보 언어의 모호함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철학적 조류의 영향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는 인식론적 전제를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사상이다. 상대주의는 좌파의 신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해 현대의 좌파 철학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잠시 철학 이야기를 해보자.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진리(진실)는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플라톤 이후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는가(인식론)에 대해서는 철학자들끼리 끊임없는 논쟁을 벌여왔다. 진리를 찾는 방법은 ‘이성’과 ‘경험’ 두 가지가 있는데, 둘 다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며 니체가 진리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부숴버리고 나서부턴, 현대 철학은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진리를 탐구하는 목표를 잊어버린 현대 철학은 이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이상향이 현실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현실화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구소련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독재와 인권 탄압의 실상이 알려지며, 좌파 철학은 경제적인 분배보단 문화적ㆍ사회적 문제에 집중하여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결과적 평등에 집중하게 된다. 그게 바로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이다.
PC주의와 전통적인 좌파 철학은 완전히 대비되는 점이 있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 무한한 진보를 믿었던 계몽주의와 달리 포스트모더니즘은 더 이상 인간의 이성과 논리, 합리성을 믿지 않는다.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이성과 논리는 백인 남성의 착취적 도구일 뿐이며, 흑인, 여성, 성적 소수자는 기득권(자본가, 서구, 백인 남성)으로부터 억압받은 피해자이기에 무조건 보상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은 사회에 종속된 존재이자 계급의 산물일 뿐이다. 이런 관점을 가진 철학적ㆍ정치적 의견을 가진 집단을 신좌파라 하는데, 사실 마르크스주의의 자본가 vs 노동자 이분법이 지배자 vs 피지배자, 가부장적 남성 vs 차별받는 여성이라는 이분법으로 옮겨간 것에 불과하다.(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에 대한 존중, 즉 휴머니즘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절대적인 결과적 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이자, 서구와 한국에서 사회적 갈등이 극심해지는 원인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진보주의는 더 이상 경제적 약자의 불행과 가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에게는 원죄를 부여하고 누군가에게는 피해자라는 도덕적 우월성을 부여해 산술적인 평등을 맞추고 있다. 나는 그 의도가 고통받는 이에 대한 순수한 연민이라기보다는, 도덕적 우월감과 나르시시즘의 표현이자 진영논리의 변형이라고 보고 있다. 이미 유럽과 미국의 대중문화는 PC주의가 주류가 되었다. 원작과 관계없이 흑인을 캐스팅하는 영화가 쏟아지는 이유다. 어쨌든 평등을 맞추었으니 소수자를 배려했다는 논리다.
진보주의자는 보통 편견이 혐오를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편견은 약자와 소수자를 향하기 때문에 이는 곧 혐오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은 혐오와 차별에 맞서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보주의자에겐 수평적인 세계관이 당연하지만, 실제 현실은 평등하지 않은 수직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위에 있는 기득권과 강자는 피해자를 착취하고, 아래에 있는 피해자는 혐오와 차별의 피해자라는 계급적 편견이 귀결된 이데올로기를 믿게 된다. 인간의 언어에는 공간적 사고방식이 은유적으로 확대되기 때문에, 위에 있는 억압자와 아래에 있는 피해자라는 인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대표적인 그 예다.
진보주의자도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사실 그 누구도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편견은 인간이 위험 요소를 재빨리 식별하고 대응하기 위해 사물과 관념을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진화한 것이다. 사바나 초원에서 살던 인류의 조상들을 생각해보자. 물소 부족의 청년인 ‘용맹한 늑대’는 초원을 걷다가 눈앞에서 사자와 마주쳤다. ‘용맹한 늑대’는 이름에 걸맞은 자부심을 버리고 도망쳐야 할까? 왜? 사실 채식을 하는 착한 사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를 잡아먹을 거라고 단정 짓는 건 편견 아닐까?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사자를 보고 도망치기보다 하이파이브를 하는 인간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판단이 틀리더라도 살아남는 편이 낫기 때문에 편견이 진화한 것이다.
인지적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뇌는 수많은 정보를 동시에 받아들일 수 없기에 이를 범주화하여 묶어서 사고하는 방식을 이용한다. 인간의 지각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편견과 고정관념은 뇌가 무한한 경우의 수를 감당하다 과부하되어 터져버리지 않도록 정보를 범주화하고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진보주의자는 인지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 보니 이를 하나의 이론이나 체계로 묶어 일반화하려는 본능이 더 강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데올로기에 끌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데올로기는 지적 게으름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는 것이 있다. 지식과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더 자신의 능력에 확신에 차 있는 것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볼 수 있다. 뭣하러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기존의 지식과 비교하고, 고민하는 머리 아픈 짓을 하겠는가. 이미 이데올로기가 그 답을 제시하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모여 집회를 열고, 차별과 혐오의 중단을 외치고, 연대한다고 해서 그 사회가 진보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 현상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의심함으로써 자신의 인지거리에 걸맞은 지적 소양을 갖추지 못하면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 진보주의자는 언제나 위선자들, 이상론만 늘어놓는 바보들로 보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서구에는 반지성주의가 뿌리내리고 있다.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상식과 어휘도 모르면서도 그걸 부끄러워하기보다는 당당한 사람이 많아진다고 느낀 적 있을 거다. 혹자는 언어가 변해감에 따라 상식의 종류가 바뀐 것이라고 말하는데, 중요한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에 대한 태도다. 서구와 한국에서도, 모든 것은 상대적이기에 기본적인 상식과 겸손도 지닐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암묵적으로 퍼지고 있다. 사실 그런 태도는 자신의 무지와 독단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비판마저도 논박할 담론 체계를 구축해 놓았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철학자들이 존재와 인식의 경계에 대해 극한까지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결국 나온 답은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선 잘 듣고 논리적으로 말해야 한다는 건 누구나 동의할 만한 것이다. 인권 개념이 출현하기 전에는 말보단 주먹이 항상 앞섰기 때문에, 정치적인 의견을 드러내려면 목숨을 각오해야 했다.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나서야 폭력보단 대화로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덕분에 이성과 논리, 상식이 소통을 위해 필수가 된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믿는 포스트모더니스트와 신좌파의 관점에서 보면, 이성과 논리는 백인 남성의 선동적 도구일 뿐이다. 결국 애초에 진실이란 것은 없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신좌파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판단 근거는 감정이 된다. 그리고 이는 서구 사회에 큰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객관보다는 주관이 우위에 서다 보니, 사상적 견제가 사라진 신좌파의 독단과 권위주의는 극심해졌다. 극좌 성향의 사람들이 말하는 걸 보면, 약자를 위한다는 진보주의자답지 않게 누구보다 오만하고 독선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애초에 진실이란 없다고 믿기 때문에, 논리적인 판단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 믿고 싶은 대로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 중에는 나름 배웠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데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대부분 포스트모더니즘의 색깔이 묻은 철학 분과나 사회과학 계열의 학문을 배운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미국 대학의 영문학을 시작으로 사회과학 계열로 확장되어 전 세계에 퍼져나갔는데, 한국의 대학에도 마찬가지로 퍼져나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대학을 거쳐 문학계와 예술계로 퍼져나가고 있고, 이제는 대중의 인식에도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진 덕분에,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과 감정이 세상을 살아갈 때 유일한 인식체계가 된 것이다. 그에 따라 자신의 감정을 다른 모든 것들보다 우선시하다 보니, 오히려 자기감정에 휘둘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살면서 우리는 여러 자잘한 부정적 감정을 겪을 수밖에 없는데, 이제 사람들은 사소한 스트레스조차 흘려보내지 못하고 감정에 맞게 상황을 해석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기분이 나쁘면 남이 잘못한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물론, 인간만큼 감정을 풍부하게 느끼는 동물은 없고, 감정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감정만으로 세상을 해석해야 할 만큼 감정이 일관되고 타당한 것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실 감정은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처음부터 질투, 동정, 분노, 증오, 혐오 같이 선명한 감정이 존재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상황에 맞닥뜨리면, 부정적 정서가 무의식을 거쳐 의식에 도달하고 나서야 우리의 뇌는 이를 질투인지, 분노인지 해석한다. 해석이 끝나면, 그때서야 우리의 마음이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평소에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만성적인 슬픔을 겪을 수도, 잠깐 울고 후련함을 느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을 수도 있다.(우울증 환자는 제외하고)
그런데 지나갈 수도 있는 사소한 일에 매 순간 부정적 결론을 내리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이는 학습되고 강화되어 점점 더 별것 아닌 일에도 화를 내게 된다. 우리 사회에 모든 것이 불편한 ‘프로 불편러’가 많아지는 이유다. 똑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감정적으로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이 있는 건, 감정이라는 존재가 타고난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인지적으로 학습ㆍ강화되거나 약화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가 신중하게 숙고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 노력하지 않고, 순간적인 감정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면 독을 품은 감정은 점차 커지다가 우리를 집어삼킨다. 그렇게 감정이라는 괴물에 잡아먹히면, 세상은 위험한 정글이 되고 일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농담과 표현까지도 나를 위협하고 불편한 것들이 된다.
한국 사회에서도 점차 위험을 과대 해석하고 불편의 경계가 늘어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으면서 ‘폭력’ ‘혐오’ 같은 자극적인 언어를 사용하며 타인의 행동과 언행을 규제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나를 불편하게 하지 마’라는 식의 불편러들이 많아지게 된 이유에는 환경적 요인도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하고 있다. 게다가 피해를 판단하는 근거가 나의 감정이라는 믿음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과 결합해, ‘내 기분이 나쁘면 폭력이다’라는 사고방식을 만들어 낸다.
그 탓에 좌파의 상대주의는 폭력과 피해를 과대 해석하며 역설적으로 권위주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과거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는 믿음 아래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말살했다면, 현재에는 네오 마르크스주의(신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은 신좌파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으로 타인의 언행을 규제하고 있다.
그 결과로, 캐나다에선 트랜스젠더를 향한 차별과 혐오 범죄를 막기 위해 BIll C-16라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트랜스젠더가 본인들이 원하는 성과 인칭대명사를 스스로 정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상식적인 선의 진보적인 법안 같지만, 이 법안의 문제점은 타인에게 언어를 강제할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부르지 않으면 처벌받는다는 것이다. 뉴욕에서도 비슷한 인권법이 발표되었다. 중립적인 인칭 대명사의 수는 최소 31개이며, 고의로 트랜스젠더가 원하는 대명사를 사용해 부르지 않으면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물론 고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전부다. 뉴욕 시민들은 이제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이름보다 성을 먼저 물어야 하며, 31개의 성을 모두 외우고 다녀야 한다. 첫 만남에 원하는 성을 불러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감옥에 갈 수도 있다.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자 진보의 핵심 가치긴 하다. 하지만 피해를 판단하는 주체와 그 근거가 사회적ㆍ일상적 통념에 근거하지 않은 채 100% 개인의 주관이라는 점이 문제다. 이상한 점은 이렇게 세세하게 표현의 자유를 막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교육 수준이 높은 선진국의 청년들에게 더 심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나쁜 교육』에서 미국 청년층의 우울증, 불안장애, 자살률이 늘어나고 극단주의자들이 득세하는 이유를 교육에서 찾는다. 그 정도가 가장 심한 집단이 바로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온 명문대생들이다. 하이트는 부모와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안전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모든 위험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 덕분에 누구보다 예민하고 불안해하는 까칠한 엘리트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유리 멘털을 가진 천재들이라는 것이다.
미국 대학생들 중에선 심리적 피해가 자신에게 실제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불편하게 느끼는 모든 것을 혐오로 규정하고,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으려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문제는 그런 방식이 당연하다고 믿을 경우 사소한 일조차 위험으로 받아들이고, 상대의 선의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는 인지왜곡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미국 대학생들 사이에선 SNS를 중심으로 ‘우리 대 그들’로 나눠 서로를 적대하는 문화가 유행하고 있다. ‘가해자 문화’라고 불리는 것인데, 미국에선 SNS로 누군가의 말을 악의적으로 해석해 혐오주의자로 낙인찍고 조리돌림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정의 투사(Social Justice Warrior, SJW)라고 조롱받기도 하는데, 트위터로 정의를 부르짖는 이들을 보고 생겨난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진보적 가치라는 이름 아래 일어나고 있기에, 세계 어디서나 진보주의는 대중의 공감을 얻지 못한 채 무력해지고 있다. 이제는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사람들조차, 인지거리가 자기 자신에만 맞춰져 있는 사람들조차 진보의 탈을 쓴 채 진보주의를 손쉽게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트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현상은 미국과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스마트폰을 자주 보는 사람이라면 한국에서도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 잘 알 거다. 나는 그 원인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고 본다. 진보주의자의 가치인 공감과 연민은 사라지고, 대신 증오와 ‘우리 대 그들’의 부족주의가 자리를 채우고 있다. 진심을 가진 진보주의자라면 남들보다 독특한 인식체계를 가지고 있는 만큼 타인의 불행과 고통에 가슴 아파할 수 있는 공감과 그어 걸맞은 지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현실 세계에 진정한 진보를 가져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