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거리와 이슈

이슈별로 보는 보수와 진보의 인지거리

by 교양이



민주주의와 선거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고 한다. 누구나 평등하게 한 표씩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어떤 압력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투표할 권리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당연함을 쟁취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려야만 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선거가 평등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거가 평등의 가치를 완벽히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선거와 민주주의가 평등주의의 반영이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선거란 근대 국가 이전까지 귀족주의적인 것이었다. 지금도 선거는 민주적이면서도 귀족주의적이다. 재산, 지위, 능력과 관계없이 누구나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한다는 점에서 평등하지만, 그 한 표를 받는 사람은 직업 정치인 또는 사회 엘리트들이다. 대개 그들은 우리보다 학력이나 재산이 많고,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 권력과 명예를 얻은 결과로 정계에 진출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욕하는 정치인들조차 여러 면에서 뛰어난 면이 많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국회 보좌관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수준 이하로 보이는 정치인들조차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처세술과 권모술수가 뛰어나다고 한다.


미국의 정치학자 마넹은 『선거는 민주적인가』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거가 되려면 추첨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대 그리스처럼 한 곳에 모인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면, 추첨제만이 구성원 모두의 의사를 평등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거는 사실 원래부터 귀족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권력을 견제하는 용도로 추첨제가 활용되었다. 미국의 배심원 제도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선거는 근대 국가에서 국민들의 동의와 정당성이 부각되며 민주주의의 꽃으로 우연하게 등장했기에, 우리는 선거가 평등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일본의 문학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우리가 비밀투표 공간에서 자유롭게 투표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현실의 권력관계는 내면에서도 작동한다고 비판한다.


보수와 진보는 선거와 민주주의의 본질을 서로 다르게 이해한다. 인지거리가 짧고 수직적ㆍ권위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보수는 민주주의 역시 귀족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한다. 국민은 정치 엘리트들의 정치적 행위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수용해야 한다고 본다. 이미 선거를 통해 정당한 권리를 인계받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은 자율적으로 정치적 판단을 내릴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싫든 좋든 정치인들의 결정과 판단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 투표로 책임을 물면 되는 것이다. 이를 신탁 이론이라고 한다.


신탁 이론에는 보수주의 세계관에서 비롯되는 수직적인 위계질서, 권위주의, 능력주의, 엘리트주의, 인과적ㆍ결정론적 사고방식이 반영되어 있다. 보수주의자는 변덕스럽고 자질이 부족한 대중 또는 국민 다수의 판단보다는 높은 식견을 갖춘 정치 엘리트들이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낫다고 본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 당선된 것 자체가 높은 능력을 가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치 엘리트들이 보기에 국민의 집단행동은 사실과 합리성에 기반하지 않고 공포와 감정에 휩쓸리기 쉽다. 권력을 부여받은(힘을 벌어들여 위에 있는) 보수 성향의 정치인들이 보기에 권력을 양도한(아래에 있는) 대중들이 주도하는 시위ㆍ집회는 사회의 안정을 해치고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이와 반대로, 진보주의자에게 선거란 국민이 정치인에게 권력을 잠시 부여한 것에 불과하다. 권력은 애초에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정치인은 잠시 양도받은 대리인일 뿐이다. 따라서 정치인은 선거에서 확인된 민의를 반영할 책임이 있다. 진보주의자의 인지거리는 국민 전체까지 연결되어 있기에, 양도한 권력은 정치인을 거쳐 정책적 효용이라는 형태로 국민에게 되돌아와야 한다. 이를 위임 이론이라 한다.


위임 이론보다 더 진보적인 입장은 시민의 정치적 참여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국민은 모든 사안의 최종적 심판자이며, 대리인이자 일꾼인 정치인이 무능력하거나 국민의 뜻을 저버리면 해고하거나 심판할 권리가 있다. 이를 주민소환제라 한다. 시민의 참여를 강조하는 관점에서는 시위와 집회, 국민투표 , 정치인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꼭 필요하다고 본다. 보수 정권이 집회나 데모, 파업을 진압하는 것과 달리, 진보 정권은 집회가 잘 진행되도록 광화문 광장을 내주고 교통을 통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보주의자는 모든 정치인이 국민과 국익을 위해 헌신할 거라고 순진하게 믿지 않는다. 진보 정권이나 정당이 권력을 잡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는 정당 정치와 사회 운동 중 어느 쪽에 중점을 둬야 하는지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진보주의자가 보기에 국가 권력은 사익을 추구하는 정치인에 의해 언제든지 오용될 위험이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말을 했다. 또 그가 지지자들에게 자신의 당선 이후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지지자들이 응원이 아닌 ‘감시, 감시, 감시!’라고 한 말도 같은 맥락이다.




법치주의



법치주의라고 하면 누구나 ‘악법도 법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떠올린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지만, 한국인들은 어떤 절차와 목적으로 법이 만들어졌든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한다. 군사 독재 시기와 권위주의적인 사회 분위기를 거쳐왔던 한국 사회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법치주의는 권력자의 폭정을 막고 기득권을 견제하기 위해 탄생한 개념이다.


마키아벨리는 법치주의의 근간은 로마 공화국이 기득권을 뇌리에 박히도록 강하게 처벌하는 데서 유래했다고 보았다. 독일 등의 서유럽 국가들이 지위와 명성이 높은 사람을 더 강하게 처벌하거나, 소득에 비례해 벌금을 부과하는 것도 로마법의 영향 때문이다. 법이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하기 위한 도구로 탄생했다는 점을 암시하는 근거다.


하지만 법치주의 개념의 역사적 뿌리와는 별도로,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는 법치주의를 서로 다르게 바라본다. 타고난 인지거리와 인식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는 법에 의한 지배(Rule by man)를 추구하지만 진보는 법의 지배(Rule by law)를 추구한다. 이렇게 법에 대한 관점은 한국의 짧은 법치주의 역사에도 나타난다. 한국에서 법은 군사 독재정권의 통치와 처벌 수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을 합리화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 탓에 한국인들의 법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모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게다가 사법부와 검찰은 여전히 정치권력과 완전히 독립되지 못했다. 그래서 국민들은 법을 처벌의 상징으로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숙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은 법이 권력 유지의 도구가 아니라 권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법치주의에 있어서 보수 인지거리의 핵심 꼭대기에는 사법부가 있고, 밑바닥에는 국민이 있다. 따라서 국민은 사법부의 판단을 전적으로 따르고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엘리트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사법 훈련을 받아온 사법 엘리트들은 자율적으로 판결을 내릴 능력과 권한이 있다. 민주화 이후 자유로운 권리 주장에 대해 사회적으로 관용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노조를 비롯한 이익 집단이 집회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전투적으로 관철하는 것을 보수는 위협으로 본다. 법에 필요한 것은 권위인데, 사회 운동은 법의 권위를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보수의 인지거리에는 혼란과 불안을 야기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칼 슈미트는 자유주의 법치주의를 경멸했고 대신 최고 통치권자의 권한을 강조했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법률가 집단은 민주주의에 대한 억제력을 가지고 있어야 함에도 검사가 선출직인 게 우려된다고 말했다. 이렇듯 보수는 민주주의의 부작용을 억제하기 위해 사법 엘리트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국민의 여론으로부터 독립되어야 한다고 본다.


반면 진보주의자에게 법은 강자를 견제하고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보수가 법을 사법 엘리트들의 통치 수단이자, 무분별한 자유를 억제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것과 달리, 진보주의자는 법을 기득권에 맞서는 저항 의지가 성문화 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기득권과 엘리트에 맞서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표현의 자유가 된다. 진보의 법치주의에는 표현의 자유가 어떤 식으로든 보호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파동을 보면, 보수와 진보의 입장 차가 뚜렷이 드러난다. 검찰은 미국산 수입 소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보도한 피디수첩 제작진을 허위 선동으로 체포했다. 보수 정당은 이를 정당한 집행으로 간주했지만, 진보는 검찰의 행동이 법치주의의 핵심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보았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실관계를 밝히지 않아 국민의 불안이 가중된 것이 문제이지, 언론이 보도를 한 것 자체는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진보는 법조인들의 지혜와 판단에 의문을 가지며, 법조인들의 결정 또한 정치적으로 악용될 수 있다고 본다. 게다가 사법 엘리트 역시 기득권의 일부인 데다 우경화되어 있기 때문에, 기득권의 불법에 대해 책임에 걸맞은 처벌을 하기보단 관용을 베푸는 경향이 크다. 따라서 법 아래 평등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평범한 개인이 사법적인 힘 차이에 유일하게 맞설 수 있는 수단은 표현의 자유뿐이다.




신자유주의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승리자라 부를 수 있다. 경제학에는 수많은 이론과 여러 학파가 있지만, 신자유주의만이 정치적 보수주의를 정당화하는 경제 이론으로서의 헤게모니를 거머쥐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주류 경제학 역시 신자유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일반인들이 경제학이 어렵거나 사실을 말하는 객관적인 학문이라고 여기는 것 또한 신자유주의가 메인이 된 주류 경제학이 지나치게 수학적이고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학은 정치적 입장이 반영된, 지극히 주관적인 학문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와 주류 경제학 역시 정치적 보수주의를 대변하는 이론적 도구로서 취급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신자유주의는 시장 만능주의로 바꿔 부를 수 있다. 학문적인 색채를 버리고 대중이 정서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단 신자유주의라는 용어는 그대로 쓰되, 신자유주의가 보수주의를 정당화하는 이론이자 주관이 개입된 경제 이론이라는 점을 알면 된다.


신자유주의에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하이에크, 통화주의자인 프리드먼, 공급 주의자인 뷰캐넌, 공급 주의자인 래퍼, 공공선택 학파인 뷰캐넌 같은 경제학 거인들의 이론이 결합되어 있다. 신자유주의가 현실 정치에서 구체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자유지상주의, 미국 제일주의, 기독교 원리주의를 내건 신보수주의 정치 운동에 의해서였다. 사실 신자유주의가 자리를 잡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대공황의 원인을 개선하고 사회주의를 막기 위해 케인스식의 복지국가 모델을 도입했다. 복지국가 모델은 1950~1960년도에 황금기를 맞았지만, 1970년대에 두 차례 석유 파동으로 장기 불황의 늪에 빠지며 한계점을 드러냈다. 그 반작용으로 영국에서는 대처가, 미국에서는 레이건 같은 보수주의 지도자가 집권하면서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한국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철학적으로 고전적 자유주의에 빚을 지고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상인 계급이 절대 왕정으로부터 로크의 자연법에 입각한 사유재산권을 주장하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후 발전 과정에서 보수주의와 사회 민주주의가 결합하며,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절대적인 자유 개념은 완화되었다. 그 결과로 자유주의는 시장을 감독하고 무제한적인 사익 추구를 억제하고, 표현의 자유를 확대하고, 국가가 적극적인 역할을 맡도록 변화했다. 자유주의는 다시 복지주의로 확대되면서, 자유주의의 외연이 넓어지게 된다.


구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보수주의 이념이라고 볼 수 있다. 구자유주의가 왕정 지배에서 해방되기 위해 자연법 개념과 소유 재산권을 발달시켰다면, 신자유주의는 복지국가의 규제에서 해방되기 위해 자유로운 시장을 정당화한다. 둘 다 이익 추구를 위해 자유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 다 보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반면 케인스식 복지국가 모델은 국민 전체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진보주의와 관련된다.


보수가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이유도 인지거리와 인식체계로 설명할 수 있다. 보수주의자의 인지거리는 자신의 이익에 한정되어 있고, 인식체계는 벌어들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제한받지 않고 벌어들이려는 욕망을 정당화하는 경제 이론이 필요해지는데, 그게 바로 신자유주의다. 그러나 인식체계가 나가는 것과는 관련되어 있지 않아, 세금을 줄이기 위해 작은 정부를 주장하게 된다.


자유로운 시장이 형성되기 위해선 몇 가지 기반이 갖춰져야 한다. 우선 누구나 경쟁을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고, 경쟁을 방해하는 규제와 감시가 폐지 또는 완화되어야 한다. 경쟁의 규모는 최대치로 확대돼야 내가 더 큰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장벽은 개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인식체계의 흐름 덕분에, 보수주의자는 민영화, 금융 규제 완화, 쉬운 해고, 관세 철폐 등 자유로운 거래가 오가는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야 내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기적 동기를 그대로 드러내 정치적 주장을 펼칠 순 없는 셈이다. 본심은 이기적 욕망에 있지만(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드러낼 수는 없으니 이를 정당화하는 이유를 무의식적에서 만들어 내고, 또 그렇게 믿게 된다. 그래서 부자와 대기업이 돈을 더 많이 벌면, 언젠가 사회 전체에 이익이 돌아간다고 믿게 된다.(사실은 내가 더 벌고 싶지만) 그게 바로 낙수효과 이론이다. 사실, 낙수효과 자체가 보수주의자의 동기화된 추론에 의해 만들어진 이론이다. 그래서 낙수효과가 결합된 신자유주의 이론에서는 자유로운 시장이 구축되면 알아서 이익과 효율성이 증대된다는 믿음과 함께, 성장을 통해 분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를 도출해 낸다. 사실 내가 돈을 더 벌 수 있다면 효율성 따위는 관심도 없고, 분배를 통해 사회에 돌려주는 것도 관심이 없지만(인지거리 밖이라), 인지거리의 한계로 인해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장 만능주의를 신봉하게 된다. 그동안의 시장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류 경제학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수학적으로만 난해해지기만 하는 이유도 이러한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전제부터가 모순되다 보니, 이를 감추기 위해 말이 길어지는 것이다.


모순은 이뿐만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경쟁 속에서 혁신적인 기술이 발전해 투자가 활성화되고 기반 산업이 발전한다고 한다. 따라서 전체 부가 늘어나 모두가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린다고 믿는다. 하지만 근 100년 동안 부의 불평등은 오히려 극심해졌으며, 글로벌 투자은행인 크레디트 스위스는 상위 1%가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고 보고서를 내놓았다. 실제론 대기업이 이익으로 재투자를 하는 비율이 높은 것도 아니며, 특허권 소송 등을 통해 기술을 갈취하거나 협력 업체들에게 비용을 부담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기술 발전으로 인해 혜택을 보는 기업은 극소수이며, 그 결과로 대기업이 시장을 선점하면 독과점이 더 심해진다.


일자리도 마찬가지다.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건 사실이지만, 생산 효율성도 같이 높아지기 때문에 노동력에 대한 전체적인 수요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겨나는 일자리보다 사라지는 일자리가 더 많아져 실업률이 올라가거나 해고된 이들은 점점 더 열악한 일자리로 몰려나게 된다. 극심해지는 불평등의 근본적 원인이 기술 혁신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이 더 많아지는 이유다. 이에 대해 보수는 오히려 노동 유연성을 높여야 새로운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쇠퇴하는 산업의 일자리는 점점 더 줄어드는 반면, 재교육을 통해 새로운 직종에 취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을 보면, 19세기 초 산업혁명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일으킨 러다이트 운동은 더 이상 옛날 일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기술의 발전을 막을 수는 없는 셈이다. 진보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실업자를 지원하고 사회 안전망을 강화해 피해를 완충하려 하지만, 보수주의자는 그것마저도 반대한다. 기술 혁신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 문제는 신자유주의 이전에 자본주의의 본질적 속성이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분배를 확대하여 불평등을 줄이려는 노력을 보수주의는 거부하고 있다.




안보와 남북문제



남과 북은 1948년 8월과 9월에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며, 자신이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정통성을 가진 국가라고 주장해왔다. 1950년 6월 25일에는 한국 전쟁이 발발하며 남과 북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며, 이념적 대립과 갈등이 극심해졌다. 그러나 한국 전쟁은 자유주의 진영인 미국과 사회주의 진영인 소련 간의 이념 전쟁이 한반도에서 대리전으로 일어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본격적으로 이념 갈등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일제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정치적 이데올로기보다 강한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남한과 북한 정권 모두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념적인 갈등을 의도적으로 조장하면서, 국제적인 이념 대립이 한반도에도 그대로 이어져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전쟁 이후엔 남에서는 평화 통일을 주장하는 정치적ㆍ사회적 세력은 친북좌파로 간주되었고, 북에서는 모든 김일성 일가에 위협이 되는 모든 정치적 세력이 제거되었다.


이후 군사적으로 여러 도발과 국지전이 있기는 했지만, 남북 대립에 있어서 더 민감하고 휘발성이 강한 문제는 안보 자체보다는 이념적 순결성 여부였다. 현실적인 국방 정책을 토론하기 이전에, 정치적으로 강경한 안보관과 대북 적개심을 검증하는 것이 우선시 된 것이다. 덕분에 보수는 안보와 남북문제와 관련해 항상 정치적 우위를 가지고 진보에게 친북좌파 프레임을 씌울 수 있었다.


안보는 6ㆍ25가 일어난 지 7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하고 파급력이 강한 주제다. 최근 들어 남북문제가 정치적 논쟁의 중요도에서 후순위로 밀려나기는 했지만, 북에 대한 적대감에 기반해 군사적으로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는 보수와, 협력과 소통을 통해 북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려는 진보 간의 치열한 논쟁이 선거를 앞두고 항상 격돌해왔다. 보수 진영이 북한 정권에 대한 공포심과 증오를 효과적으로 자극하고 진보에게 친북좌파라는 프레임을 덧씌운 덕분에, 문재인 정부 이전까지도 ‘그래도 보수가 안보는 믿을만하다.’는 인식이 깔려있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역대 정부 통틀어 국방력을 가장 크게 확충하고 장병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 국민들에게 체감되자, 보수=국방이라는 등식의 믿음이 깨져버렸다. 이후 안보와 남북문제는 젊은 층에게 정치적으로 민감한 순위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럼에도 보수주의자가 강한 군사적 대응을 선호하는 것은 사실이다. 군사적ㆍ이념적 적대 관계에 있는 경쟁 집단은 보수에게 인지거리 밖에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대화와 설득, 협력을 통해 평화를 이끌어내는 진보의 접근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보수는 그런 방식을 잠깐의 평화를 위한 구걸이자 굴종으로 받아들인다. 보수주의자의 내집단 선호, 경쟁 집단에 대한 적대감, 그들에 대한 공포심, 엄격한 도덕성 같은 특성들이 안보 태도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다. 보수가 진보에게 북이 주적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캐묻듯이 따지는 것처럼, 보수주의자는 안보도 선악의 문제로 이해한다. 보수주의자들이 보기에 북한 정권은 자국의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핵 개발에만 투자해 적화 통일을 획책하는, 한반도를 위협하는 악의 무리에 불과하다. 그러니 협력과 교류를 제안하면, 평화를 구걸하고 얕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는 북이 먼저 핵을 포기해야 협력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파의 안보관은 남북 관계가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적대적인 국가 사이의 관계라는 기본 인식에서 출발한다. 보수는 외교보단 군사적 대응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얕보이지 않기 위해 군사력을 늘리는 것에 찬성한다. 혹 남한이 먼저 협력의 손길을 내밀어 관계가 개선되어도, 북한 정권은 무력통일과 화전양면의 의도를 숨기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역대 군사력 증강 추이를 보면, 더 많은 최신 무기를 도입하고, 국방비를 증액하고, 방산비리를 개선하고, 병사 월급을 더 올려주고, 미국으로부터 전시작전 통제권(전작권)을 되찾아 오려는 곳은 항상 진보 진영이었다.


이러한 모순 역시 인지거리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보수주의자에게 있어서 안보 문제가 체감될 때는 라이벌 집단의 위협이 현실로 다가오거나, 이념적 대립이 뚜렷해질 때뿐이다. 즉, 눈앞에 공격하는 적이 있어야만 국가 안보라는 개념이 인식범위 안으로 편입될 수 있다. 항상 있는 도발 가지고 말로는 당장 전쟁이 날 것처럼 두려움을 조장하지만, 사실상 평화 상태라 군사력을 키우고 국방비를 증액하는 문제는 인지거리 밖에 있는 것이다. 뭔가를 개선해야겠다는 문제의식이나 발전하려는 인식이 인지거리 안에 없으니, 통념과 다르게 보수보다 진보 진영이 국방비에 더 큰 투자를 하는 것이다.


전작권 회수 문제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한미동맹을 맺고 있어 우리를 북괴의 위협으로부터 구해주고 경제 원조를 해준 큰 형님 같은 존재니, 미국의 지휘를 계속 받는 것이 낫다는 쪽으로 인식이 흐르게 된다. 반면 진보에게는 미국 역시 인식 대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래서 미국 역시도 자기들의 국익을 위해 일시적으로 한국과 협력할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도 한국은 동맹국일 뿐이며, 미국의 우방국은 같은 영미 문화권 국가인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뿐이다.(왜 그런지 우리는 이제 이해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믿을 건 스스로의 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는 쪽도, 전작권을 회수해 자주국방을 실현하려는 쪽도 보수가 아니라 진보가 된다.


북핵 문제도 마찬가지다. 진보주의자는 북한의 핵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남북 협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보수가 생각하는 대로 굴종하지는 않는다. 보수주의자들이 '필요하면 전쟁도 불사할 수 있다'는 식으로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 것과 달리(사실 아무 대책도 없지만), 보통 진보는 군사적 대립보단 대화와 협력을 우선시한다. 그렇다고 진보가 ‘튼튼한 안보와 강한 군대’의 필요성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다만 대북 억지력을 위해 군사력을 증강시킴과 동시에 대화와 협력을 통해 북을 양지로 이끌어낸다는 투트랙 전략(Two-Track)을 추진하는 것뿐이다. 김대중 정권의 햇빛정책이 그 예다. 진보는 경제, 사회문화적 협력을 통해 점진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남북 긴장과 군사적 대립을 줄여 핵 포기까지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애국



2003년 유시민 의원은 국기에 대한 맹세가 ‘군사 파시즘과 일제의 잔재’이고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기 때문에 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같으면 납득할 수 있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비슷한 주장이 계속 제기되면서, 2007년 7월에 ‘조국과 민족의’와 ‘몸과 마음을 바쳐’라는 말이 빠져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2009년엔 한국 노동연구원의 한 연구원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해 해고되기도 했다. 이제 애국심이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애국심이 없다는 건 입 밖에 꺼내기도 어려운 말이었다. 물론 나는 진보주의자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말도 별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 관용적인 표현이니 그 정도는 너그럽게(?) 넘어가 주겠다.


한국인의 애국심은 국가에 의해 조장되고 만들어진 면이 있다. 국민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 체제를 거치면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시민보다는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이 되도록 교육받아 왔다.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하던 것을 멈추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읆어야 했던 그 시대 때문에, 진보는 애국심을 군사 정권과 독재의 이데올로기로 바라본다. 그러나 모든 진보주의자가 동일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진보주의자 역시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다만 보수주의자와 방식이 다를 뿐이다.


국뽕 어벤져스


보수주의자에게 애국심은 당연한 것이다. 보수주의가 느끼는 애국의 의미는 이렇다. '자신이 사는 이 땅의 이념과 정체성을 이해하고, 이를 내면에서 존중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에게 국가란 자신이 태어나고, 사는 곳이고, 자신을 지켜주는 곳이기 때문에 무조건 사랑하고 존경할 대상이다. 보수는 인지거리가 짧은 만큼 국가라는 공동체에 더 큰 애정과 애착을 가진다. 하지만 애국심의 범위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갈 수도 있다.


애국심의 개념이 한 발 더 나아간다는 것은, 바꿔 말해 인지거리가 더 짧아져 국가에 대해 더 애착을 가지게 되는 걸 의미한다. 그러면 인지거리 밖 외부에서 벌어들인다는 인식도 강해진다. 그래서 국익에 헌신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라는 생각이 도출된다. 그 자체가 상식을 벗어나는 명제는 아니지만, 국익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명확하지 않기에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국익을 위해 수단과 도구를 막론하지 않고 벌어들이겠다는 인식이 강해지면, 국가 체제가 제국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거기에 대해 인지거리 밖 외부에 대한 공격성까지 추가되면, 국가 체제는 파시즘이라는 형태로도 나타난다. 이렇게 기본적인 인권과 도덕을 어겨면서까지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 게 바로 극우다. 옆 나라 자민당이 극우적인 형태를 보이는 걸 보면, 애국심이 선을 넘지 않도록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 진보주의자에게 애국심은 선택사항이다. 애국을 추구하는 것은 국가가 얼마나 민주적인 가치를 실현하냐에 따라 달려있다. 90년대 초 탈냉전과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민주적인 애국심 또는 개인의 자유를 더 중시하는 진보의 애국심이 생겨났다. 진보에게 애국심이란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근거가 있냐 없냐에 따라 갈린다. 그래서 보수는 애국심을 도덕적으로 호소하지만 진보는 애국심을 인권과 민주적인 측면에서 바라본다. 오바마 후보 부인 미셸은 ‘살면서 처음으로 조국이 자랑스럽다’고 말해 보수의 공격을 받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미셸 오바마의 말을 보면, 진보가 애국심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드러난다. 미셸에게 있어서 미국은 인종 차별 때문에 애국하고 싶지 않은 국가였지만, 나중에는 민주적 가치를 실현했기 때문에 애국심을 느낀 것이다. 따라서 진보주의자가 애국심을 느끼도록 하려면, 개인의 자유가 광범위하게 실현될 수 있는 세상, 즉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가 되는 것이 우선이다.




성장과 분배



한국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적인 경제 구조조정을 대규모로 단행했다. 그 덕분에 비교적 짧은 기간에 외환위기를 극복했지만, 그 대가로 강도 높은 구조 조정과 대외 개방, 비정규직 같은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이루어져 많은 사람들이 빚더미에 앉고 일자리를 잃었다. 한국은 그동안 해오던 국가 주도식의 동아시아식 발전 모델이 아니라 미국식 시장 경제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소득 불평등과 빈곤 문제가 커지고, 부동산 거품이 심각해졌다. 소득분배 상황은 지니계수로 측정하는데,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하고,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한 사회임을 뜻한다.


한국의 지니계수는 가처분소득을 기준으로 측정하면 다른 OECD 국가들보다 상당히 높다. 그만큼 소득 분배가 불평등한 사회라는 뜻이다. 한국 사회는 선성장 후분배의 논리에 따라 분배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과 경험이 증명하는 것처럼, 분배를 경시하면 성장도 지속될 수 없다. 게다가 성장의 과실이 일부에만 집중되면 사회 구성원들의 박탈감과 불만, 소외감이 누적되어 사회 분열이 가속화되고, 사회 전체의 생산성이 위축된다. 결과적으로 국가 경쟁력까지 위축되고,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형태를 보이게 된다.


이를 근거로 진보가 소득 분배와 복지 확대를 주장하면, 보수는 소득 분배와 복지를 위해 세금을 올릴 경우 국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반박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소득 분배의 차이가 심하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률을 떨어트리지만, 사회 복지 수준이 높다고 성장이 정체된다는 주장은 실증적 근거가 없다. 오히려 소득이 올라가도록 복지에 투자하면 단기적으로는 내수를 촉진할 수 있고, 교육에 투자하면 성장 잠재력을 확충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


보수는 분배보다 성장이 중요하고, 재분배 정책은 경제성장을 가로막는다고 본다. 보수가 보기에 사회복지 확충을 위해 재정 지출을 확대하면, 재정 건전성이 악화되고 세금 부담을 높여 기업의 경제 활동을 가로막는다. 분배와 평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는 대신 게을러진다. 그 대가로 투자와 경쟁력이 위축된다. 노동시장이 경직되고 강성 노조가 비효율을 초래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다. 보수는 자유로운 시장이 작동해서 생긴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믿거나, 시장의 실패가 정부가 개입해서 생긴 문제로 본다. 따라서 정부의 개입을 더 최소화해야 시장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고 경제도 성장할 수 있다고 본다. 소득 격차 역시 기술의 급격한 변화와 세계화가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식체계가 벌어들이는 것에만 초점이 가 있다 보니, (내가) 더 벌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는 것이다.


진보주의자가 보기에, 소득 분배가 불평등하면 경제성장도 저해된다. 소득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해지면 수요가 줄어들어 내수 시장이 무너지고 기업의 투자와 이익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케인스가 주장한 바와 같이, 저소득층은 소비로 지출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소득분배가 불평등해지면 저소득층의 소비가 위축되어 경제 전체의 소비가 줄어들고 국내 수요가 감소하고 투자가 정체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가계 가처분 소득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가계 부채는 세계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 물가와 부동산, 임대료 등 모든 것이 오르는데 소득만 오르지 않으니 빚을 내야만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진보는 소득 불평등의 해결책으로 사회 복지 지출 증대, 최저임금 인상, 부유세와 부동산세 등 고소득층에 대한 과세 증대를 제시한다. 또 기회의 평등을 위해 공교육 수준을 높이고, 직업훈련 등 노동자에게 주는 도움을 늘리고,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는 것 등 정부가 강력한 규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본다. 진보의 인지거리가 국민과 국가 경제를 포함하기 때문에, 인지거리 안에서 복지가 성장을 촉진하면서 돌고 도는 게 진보주의자에겐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국가가 평등한 분배에 집중해야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범죄와 처벌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청원이 들끓고 있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기에 신상을 공개해 수치심을 줘야 한다는 쪽과, 범죄자라도 기본적인 인권을 지켜줘야 한다는 쪽이 맞서고 있다. 사형 제도도 마찬가지다. 양 쪽 모두 나름의 근거가 있지만, 근본 쟁점은 신상 공개나 사형제도 자체가 아니다. 범죄의 원인이 무엇이고, 범죄자가 어디까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는가이다. 범죄자의 처벌을 두고 보수와 진보는 입장이 확연히 갈린다. 보수는 범죄자 개인의 도덕성이나 인격적 결함 때문에 범죄가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진보는 범죄에는 개인의 일탈뿐만 아니라 사회적 모순도 반영되어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보수는 온전히 개인에게 범죄의 책임을 묻지만, 진보는 범죄를 야기시킨 사회 구조를 해결하는 게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보수는 수사력을 확충하고 처벌을 강화해 범죄를 줄일 수 있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의 인간관은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사람’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범죄를 저질러서 얻는 이익과 손해를 비교해 이익이나 더 클 때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면 쾌락보다 손해와 고통이 크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는 논리가 도출되어, 엄하게 처벌해야 다른 이들도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깨진 유리창 이론을 근거로 무관용 원칙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체의 질서를 위해 사소한 잘못이라도 일벌백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보수에게 있어 범죄자들은 인지거리 밖에 있는 존재들이다. 사람은 자제심을 기르고 노력을 통해 정당하게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데, 범죄자들은 정당한 대가 없이 쉽게 이익을 얻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범죄에 대한 처벌은 전적으로 그들에게 있으며, 그 죄질이 심하면 사형도 허용될 수 있다. 또한 인지거리 안에 있는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려면 엄격한 처벌과 함께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따라서 경찰 인력과 CCTV를 확충하고, 흉악범죄 전문가를 양성하고, 과학수사 장비와 시스템을 갖추어 수사력과 검거율을 높여야 한다. 죄를 지으면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확실한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보는 불평등과 소외를 줄여야 범죄를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진보주의자에게는 범죄자 역시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에 인지거리 내에서 고려해야 할 대상들이다. 그들의 범죄가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범죄자 역시 사회의 일부분으로서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에 처하지 않았다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범죄는 사회의 문제이기도 하며, 불평등이 범죄를 양산하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빈곤과 사회적 배제가 범죄를 양산하는 배양지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빈곤층의 아이들은 사소한 일탈도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좋은 역할 모델을 배우기가 어렵고, 범죄를 학습하고, 가정폭력의 위험도 크다. 그래서 처벌을 강화하기보단 범죄를 예방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사법 체계 역시 계급과 계층에 따라 불평등하다. 상류층은 더 실력 있는 변호사를 고용해 죄질을 탕감받기 쉽지만, 저소득층은 변호사를 고용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게다가 판사들은 상류층과 기득권의 범죄는 묵인하지만 하류층은 가혹하게 처벌한다. 화이트칼라 범죄는 전문적이고 발견하기 어렵지만, 집행 유예를 통해 쉽게 풀려난다. 반면 빈곤층이 관련되는 사소한 절도나 경범죄는 훨씬 쉽게 발견되며 강력하게 처벌받는다. 따라서 강력한 처벌이 범죄를 줄인다고 하는 보수주의자의 주장에는 모순이 있다.




표현의 자유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모든 사람의 자유가 보장되기 전에는 누구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밀은 시민이 다양한 사상과 견해를 적극적으로 섭렵하고 토론할 수 있을 때, 그 사회가 최선의 지혜에 다가가고 민주주의를 완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는 기본권의 핵심이자 민주주의 국가의 목적이며 전제조건이다. 원친적으로 국가는 개인의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절대 침해해선 안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무제한적으로 보장해줄 수는 없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안정이 상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표현의 자유(집회 및 시위, 인터넷 실명제와 검열, 게시글 삭제)와 프라이버시(주민등록제, CCTV, 유전자은행), 통신 감청, 간통 등 자유권적 기본권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자유권적 기본권이란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국가나 타인으로부터 개인이 신체, 양심, 사상, 및 사생활과 재산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다. 그러나 자유를 행사하다 보면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 제약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간에 벌어지고 있다.


보수주의자에게 있어 인지거리에 더 가까운 대상은 개인이 아닌 국가다. 추상적 개념인 개인을 위한 표현의 자유보다는 국가라는 공동체가 보수에게는 더 실체적이고 인지거리에 가까운 존재다. 이는 보수주의자의 인식체계가 집단을 우선시하도록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는 국가라는 공동체를 위협하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허용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보수에게 있어서 경제적 자유를 제외한 사회적ㆍ문화적 자유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보장되어야 한다. 자신의 사상이나 의견을 표명하는 표현의 자유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닌 셈이다. 헌법에서도 표현의 자유는 헌법 제21조에 의해 보호받지만, 같은 조 제4항에 의해 타인의 권리나 명예를 침해해서 안 된다는 제약을 받는다. 보수주의자는 그 침해의 영역을 진보주의자보다 넓게 본다. 피해와 손실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 글은 무책임성과 전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빌미로 욕설을 하거나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행위는 강력한 응징이 필요하다고 본다. 집회 및 시위의 자유도 마찬가지다. 촛불 집회는 70여 일 동안 종로와 광화문 인근 가게에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보수주의자가 보기에 자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인정될 수 있기에, 불법 집회나 시위자들에게는 불관용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비용과 혼란, 무질서가 야기될 수 있다.


진보주의자가 보기에 표현의 자유는 권력의 억압에 맞서는 개인의 유일한 저항 수단이므로, 표현의 자유는 어떠한 경우에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지거리에서 개인이 국가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도록 정당, 언론, 조직, 인맥 등 다양한 수단을 가지고 있지만 약자는 자유로운 의사 표현이 민의를 드러내는 유일한 전달 도구이다. 만약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면 약자의 목소리는 공론장에서 사라지고, 기득권이 사익을 위해 국가를 독단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표현의 자유가 있어야지만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공론의 장을 거쳐 정책으로 반영될 수 있다. 진보의 인식체계가 기본적으로 다양성을 포용하는 쪽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나오는 생각이다. 진실은 권력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스스로 나타난다. 따라서 자유롭게 생각을 드러내고 허위를 비판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집회의 자유는 사회, 정치 현상에 대한 불만과 비판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게 함으로써 정치를 개선할 수 있다. 또 언론 매체에 접근할 수 없는 사회경제적 약자의 의사표현 수단이기도 하다.




인권과 소수자



한국의 인권 개념은 서구에서 200~300년 동안 벌인 투쟁 성과를 그대로 직수입한 것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재산과 납세에 따른 참정권 차별이 사라진 건 1850년대이고, 흑인에게 선거권이 주어진 건 1870년대이고, 미국 여성에게 선거권이 주어진 건 1920년대이다. 하지만 한국은 1948년 제헌 의회 구성 시기에 어떠한 투쟁도 거치지 않고 모든 성인 남녀에게 투표권을 줬다. 게다가 한국은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면서 인권이란 개념 자체가 성숙될 기회도 얻지 못했다. 그 덕에 1987년에야 국가인권위원회가 출범했다. 인권과 관련해 중요한 쟁점은 소수자 우대 정책이나 적극적 조치가 공정한 것인지, 역차별인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 논쟁의 밑바탕에는 인권을 개인의 권리로 볼 것인지, 집단의 권리로 볼 것인지와 관련된 딜레마가 숨겨져 있다.


보수주의자에게는 소수자나 약자만 인지거리 내에 우선 대상으로 편입될 이유가 없다. 인권이란 인간 전체의 보편적 권리를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보수는 개인주의적 인권을 옹호한다. 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 인권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사상적 토양에는 자신의 이익을 증가시킬 권리, 국가나 개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연권을 보장하는 고전적 자유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반영된 관점에서 보면, 인권은 혈연, 지연, 학연, 인종, 종교에 따라 개인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대한다는 보편주의적 원칙에 따라 발전해온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 성 소수자, 여성, 빈곤층이라고 해서 우선적인 도움을 준다는 집단적 인권 개념을 보수는 인정하지 않는다.


보수는 성소수자를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펴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보수주의자 역시 성소수자가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러나 성소수자만을 위해 우대 조치를 펴는 것은 소수를 위해 사회의 안정을 허무는 일이다. 사회 규범은 인간이 함께 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며, 모두가 따라야 하는 것이기에 예외는 없어야 한다. 게다가 보수주의자는 성 소수자들은 사회 규범과 자연적인 질서를 벗어나 건전한 성 관념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본다. 인권을 보장하는 이유는 결국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보수는 성소수자들이 주민등록증 상의 성별을 바꾸고, 군대에 입대하지 않고, 결혼 제도에 편입되는 것은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본다.


반면 약자를 배려하는 진보의 인식체계로 인해, 진보에게 소수자는 인지거리 내에의 우선 대상에 속한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는 한국 사회의 인권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와 장애인, 여성, 이민자 등 소수자의 자유와 권리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본다. 진보가 보기에 보수의 개인주의적 인권 개념은 사회적 강자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보편이라는 이름 아래 약자가 종속되는 것을 은폐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여성 단체들은 집단적 인권 개념을 제시한다. 그 주장의 근저에는 개인은 집단에 의해 종속되고, 개인의 권리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차이에 의해 규정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소극적인 인권 개념은 사회적으로 소외된 집단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집단적 인권이 반영된 적극적 우대 조치만이 차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주의자는 성소수자의 권리 역시 사회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 성소수자의 욕구와 정체성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사회와 국가는 적극적으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행복추구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차별당해서는 안 된다. 소수자는 사회적 인정 여부에 따라 성소수자와 그 밖의 소수자로 분류될 수 있다. 여성, 이주자, 장애인 등은 편견의 문제가 수반되기는 해도 자원의 분배가 주된 문제이고, 성소수자의 경우에는 편견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진보는 분배적 정의와 사회적 편견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 인권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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