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대형서점에 들러 어떤 책이 잘 나가는지 나름의 시장조사를 할 때가 있다.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까. 책이 좋아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순수한 목적으로 책을 대하진 못 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떤 책이 돈이 될지 하는 음흉한 시선으로 책을 바라본다. 소득이 없진 않았다. 잘 팔리기 위해 필요한 게 뭔지 깨달았으니까. 한국의 베스트셀러들은 공통점이 있다. 주로 심리학과 관련된 에세이 장르거나, 사람들에게 힐링이나 위로를 주는 책이다. 비단 출판업계뿐만 아니라 예능이나 미디어 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사람들은 위로에 목말라한다.
심리학계도 마찬가지다. 오직 심리학만이 대중의 관심을 받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 불쌍한 철학과 대학원생이 배고픈 소그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더 낫다는 걸 깨달아가는 동안, 심리학자들은 상담과 강연 등 일거리가 넘쳐나서 바쁜 나날을 보낸다. 심리학은 국가나 인종, 문화를 막론하고 인기가 많다. 한국인들은 MBTI로 자신과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려 애를 쓰거나, 아니면 심리 에세이에 기대서라도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려 한다. 이렇게까지 일반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학문은 심리학뿐이다.
사람들이 심리학이 주는 지적 깨달음에서 위로를 얻으려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앎을 통해서 위안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런 목적에서 우리가 심리학을 찾는 거라면, 물리학을 통해서 위안을 얻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럼 물리학자를 찾아가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다. "제 몸, 그리고 우주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나요?" 그리고 물리학자의 조언으로 위안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리상담센터가 아니라 물리상담센터라는 간판을 단 병원이 개원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환자는 노트와 필기구를, 물리학자는 분필과 지우개를 들고 칠판 앞에 서게 될지 모른다. 치료 도구로는 청진기 대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이 이용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원자의 위치와 속도를 둘 다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 역시 원자로 이루어져 있죠. 지금 환자분이 느끼는 고난과 불행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확률적으로 지금 이 순간 존재할 뿐이죠. 영원한 것이란 없으며, 결국 이 또한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영업 수완이 좋은 물리상담학자라면, 이렇게 불교의 가르침과 물리학을 융합해 큰 인기를 얻을 수도 있다.
휴 에버렛의 다세계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체크무늬가 그려진 흰색 가운을 입은 물리학자가 칠판에 복잡한 그래프와 방정식을 다 채워 넣은 후, 마무리 멘트를 준비한다. 환자는 반쯤 졸다가 깨어나 이제 끝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물리학자가 말한다. "나라는 존재는 매 순간 다른 선택을 한 '또 다른 나'로 분화됩니다. 다른 우주 어딘가에선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내가 있을 수 있죠. 무한대의 우주 속 어딘가에는 백만장자인 나, 금수저를 물려받은 나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니 집착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글쎄,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논리와 이성으로 힐링이 가능했으면 진작에 다들 도서관에 처박혀 있었겠지. 우리는 장기적으로 삶의 태도를 바꿔주는 철학자의 말보다는 당장 아픈 내 마음을 치유해 주는 심리학을 찾아 서점을 헤매고 다닌다. 감정심리학이 유독 대중과 친숙한 이유다. 힐링은 하나의 키워드로서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유독 한국인들만 힐링이라는 말을 자주 쓰고, 다른 국가에서는 비슷한 말조차 없다. 힐링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다. 이를 사회적 맥락에서 바라보면, 한국인들은 주기적으로 힐링을 해야 할 만큼 마음근육에 생채기를 입는 일이 잦다는 뜻이다. 그 결과 우리의 자존감이 근본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자존감이란 자기 효능감, 또는 자아존중감으로 불리며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자존감의 척도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반쪽짜리 정의다. 정확히 말해 자존감이란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스스로가 평가하는 정도'를 의미한다. 남이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고 스스로를 평가하면 자존감이 높은 것이고, 반대의 경우엔 자존감이 낮은 것이다. 자존감은 타인과 사회의 가치판단에 의해 결정되며, 순간순간의 평가에 따라 자존감은 높아질 수도 낮아질 수도 있다. 자존감은 고무공처럼 늘어났다가 쪼그라들 수도 있고, 큰 충격을 받으면 펑하고 터져버릴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별 것 아닌 거 같은 조그마한 바늘에 찔려도 터져버리는 게 자존감이다. 우리 마음은 생각보다 약하고 여리다.
왜 우리는 이렇게 자존감에 목을 매는 것일까?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수렵채집인으로 살아가던 조상들의 시대에서 타인의 평가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자원 획득, 짝 찾기, 도움 얻기, 양육, 유용한 정보 얻기 같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의 울타리 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들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의 평균치, 즉 평판을 강박적으로 관리하고 혹시 내 평판이 떨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갔다. 물론 지금 환경은 1만 년 전의 아프리카 평원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평판을 관리하고 자존감에 목매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집에서 한 발자국 안 나간 채 컴퓨터만 붙잡고 있을 있을 때도 우리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내 의견을 반박하는 익명의 인간과 키보드 배틀을 벌이거나, 소셜 미디어에 들어가서 내 게시글에 '좋아요'가 얼마나 눌렸는지 수시로 체크하거나, 나를 빼고 놀러 간 내 친구들은 뭘 하고 있는지 몰래 확인하거나, 음주운전을 한 연예인의 도덕적 해이에 분노를 터트리거나, 양악수술을 한 듯 보이는 연예인의 기사에 악플을 단다. 아니면 하루종일 넷플릭스를 보거나. 겉보기에 전혀 상관이 없는 행동들이지만, 사실은 같은 목적에서 이루어진 행동들이다. 모두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거나, 회복하려 하거나, 또는 자존감이 부족할 때 나타나는 모습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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