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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테씨 May 21. 2021

끊어져버린 인내심의 끈

그래도 사랑해

- 제발...! 자라고!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왜!

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터졌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인내심의 끈이 끊어져버렸다. 


잠 자기 전 양치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전쟁이 시작된다.

- 열 개만 하자. 열 개만 하고 사탕 줄게.

양치를 죽어라 거부하는 30개월 아들님과의 전쟁이다. 숫자로 1부터 10까지 셀 때까지 모든 양치를 끝내야 하며 그마저도 하나, 둘까지 하고 술래잡기 한 번, 바닥에 눕혀놓고 셋, 넷, 다섯까지 하고 몸부림치는 아이를 다시 고쳐 잡아야 한다.

- 다섯 개! 다섯 개만 하면 돼. 다섯 개 하고 사탕 줄게.

그나마 양치 거부가 심한 아이들을 위한 육아 꿀템이자 양치 후에도 먹을 수 있는 딸기맛 자일리톨 사탕의 보상이 있기에 겨우 가능한 양치질이다. 사실 제대로 닦아주고 있는 지도 잘 모르겠지만 매일 최선을 다 다. 양치가 끝나면 이미 나는 기진맥진 방전 모드가 된다.


침대에 누워서 잠들기까지 2차전의 시작이다. 고맙게도 야행성인 아빠가 같이 다. 같이 놀다가 책 읽고 잠드는 것이 평소의 평화로운 패턴이다. 그런데 오늘, 그 평화가 깨졌다.

- 배고파요,

- 응? 너 조금 전에 맘마 먹었잖아. 그것도 많이.

- 배고파요.

-진짜?

-응, 진짜

요새 평소보다 양이 늘었는지 배고프다는 말을 자꾸 하긴 했지만, 저녁밥도 평소보다 많이 먹은 상태였다. 양치까지 다 시켜놨고 잘 준비 다 해 놓은 밤 11시 30분이었다. 배고프다는  말이 이렇게 무섭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다 큰 성인이 그 시간에 배가 고프면 알아서 먹고 씻고 자겠지만 30개월 생명체가 배가 고프면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음... 맘마 먹으면 치카치카 또 해야 하는데, 할 거야?

-응! 하꺼야

-진짜 할 거야?

-응! 진짜 하꺼야!

-진짜 진짜 진짜 치카치카할 거야?  진짜?

-응! 진짜 진짜!

잠들기 전 무언가 먹고 싶다고 하고 양치한다고 대답은 하고서 정작 할 때는 미친 듯이 거부한 전과가 있기에 몇 번이나 다시 물었다. 야식도 두 번째 양치도 무사히 끝내고 다시 누웠다.


-이제 진짜 자 자. 12시 다 됐다.

-응가

-... 응?

-응가

기저귀를 확인해보니 다행히 '존재'는 없었다.

-응가 없는데?

-씨꼬 시퍼요

-응? 엉덩이 씻고 싶어?

-응

용변을 보지 않았는데 씻고 싶다고 말한 건 처음이다. 어쨌든 씻고 싶다니 야밤에 또 대야에 물을 받았다. 씻기고, 기저귀 채우고 바지 입히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진짜 자자! 잘 자~굿 나잇!


-엄마, 엄마

보통 자는 척 대답이 없으면 스스로 자기에 잠든 척했다.

-엄마, 엄마, 엄마!!!!!!!!!!!!!!

- 아 쫌! 자라고! 왜 그러는 건데 왜!


터졌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터져버렸다. 비명을 지르듯 엄마를 외치는 날카로운 소리에 인내심의 끈이 끊어져버렸다. 나의 큰 소리에 놀란 아이는 울기 시작했고 순간 엄청난 자괴감이 나를 다. 아무리 지쳐도 소리는 지르면 안 되는 걸 알면서 참다 참다 질러놓고 엄청 자책하고 후회할 걸 알면서 순간 감정을 못 이긴 내 자신이 제일 싫어지는 순간이 왔다. 침대에서 나와 작은 방으로 도망쳤다. 커다란 자괴감에 눈물이 흘렀다.


침대방에서 오빠가 아이를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 말 잘 들어야지. 잘 시간이니까 자야지

-엉엉 우왕  아빠

-엄마 말 안 들으니까 엄마 화났잖아.

-아빠 엉엉, 사랑해줘요.

(*30개월 아이 언어 : 어른들이 안아주면서 '사랑해요'라고 하니까 사랑해줘요를 안아달라는 표현으로 쓴다)

-아빠가 안아줄게요.

-(엉엉엉) 이 쪽, 이 쪽

-엄마한테 가볼까?

-(엉엉엉)이 쪽(엄마 있는 쪽)가고시퍼요


아이가 오빠한테 안긴 채로 내가 있는 방으로 왔다. 아이한테도 오빠한테도 너무 미안해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엄마한테 여누가 미안하다고 해

-(쭈뼛쭈뼛)

-얼른, 여누가 엄마 사랑해 해주는거야(*안아주는거야)

-엄마, 사랑해~

-미안해도 해야지


엄마라는 어른이나 되어서 감정하나 조절 못하고 아이한테 소리 지른 내가 잘 못 한 건데, 나를 탓하지 않는 오빠가 고마웠다. 이미 나 스스로도 내 탓임을 알고 있는데 오빠까지 내 탓을 하면 정말 설 곳 없이 방황했을 것이다.


-엄마, 미아네

-(엉엉엉) 엄마도 미안해. 엄마가 여누 많이 많이 사랑해

-여누~침대에 자러 가꺼야

-그래, 자러 가자


진작에 잔다고 했으면 좋았을 걸, 승자도 패자도 없이 상처만 잔뜩 남은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잠자러 간단다. 그렇게 1시가 다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의 자존감은 사라진다. 오빠는 아이와도 잘 놀고 화도 잘 내지 않는다. 신기하고 존경스러울 만큼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내가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육아는 시부모님께서 도와주신다. 사실상 주양육자는 시부모님 인 셈이고 아이를 향한 시부모님의 사랑은 무한대이다.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극히 적은 횟수이긴 하지만 자존감이 사라지고 엄청난 자괴감이 엄습해오는 날이면 나만 없으면 참 평화로울 것 같다는 무서운 생각을 한다. 소리 지르는 엄마가 있는 거보다 무한사랑을 주는 시부모님이 나을 거라는 생각, 소리 질렀던 내가 그 순간에 없었으면 늦은 시간까지 오빠랑 놀다가 잠들었을 거라는 생각, 오빠는 좋은 사람이니까 나보다 더 성숙한 여자이자 아이한테도 더 좋은 새엄마를 금방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지만 말이 될 것 같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정말 다행인 건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것. 이 생각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러기 위해 혼자 싸울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 내가 오빠랑 내 아이를 제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확신, 내가 더 성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 오빠랑 아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마음, 내가 여기 있고 싶어한다는 사실 등등 내가 이 곳에 존재해도 될 이유들을 찾고 마음을 다잡는다.


늦은 새벽 감정이 정리되고 눈물을 닦았다. 잠을 청하기 위해 침실로 가보니 오빠와 아들님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어쩜 그렇게 똑같은 포즈로 자고 있는지 이럴 때 보면 유전자는 참 신기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잠을 자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이 나온다. 고마움과 사랑을 담아 오빠의 볼에, 사랑과 얄미움을 담아 아들님의 볼에 뽀뽀를 선사했다. 꿈틀거리는 두 사람 옆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이런 게 가족인가 보다.

잘 자, 오늘도 사랑해

<Family>, 출처:Can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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