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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석 Sep 07. 2020

(경주여행-1) 나만의 면도와 감자탕, 그리고 안대

8월 11일(밤)~17일까지 경주 여행기


어떤 면도법의 방법에도 철학이 있다.
-서머싯 몸-


아주 작은 일이라도 꾸준히 반복하다 보면 각자 자기만의 방식이 생긴다고 한다.

실제로 면도하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자. 먼저 쉐이빙 젤로 목과 턱, 입 주변을 골고루 바를 것이다. 젤에서 하얀 거품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입 주변부터 면도할 것이다. 그다음으로 좌우의 털을 밀고 마지막으로 턱 아래에서 위로 역방향으로 면도를 할 것이다. 누구는 전기 면도를 선호할 수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습식 면도를 좋아한다. 왠지 깔끔하게 잘리는 느낌이 좋아서이다.


또 다른 예로 선생님들과 감자탕을 먹으러 갈 때도 각자의 스타일이 보인다. A 선생님은 건더기와 시래기를 가위로 잘게 잘라 밥과 비벼먹는다. 이후에 고기를 먹는다. B선생님은 뼈에서 고기를 분리해낸다. 그리고 국물과 섞어 밥에 비벼 먹는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가히 새로운 메뉴를 만드는 것 같다. 나는 시래기를 먼저 먹는다. 왠지 야채를 먼저 먹으면 건강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핫도그에서 소시지를 마지막에 먹는 타입처럼 고기는 마지막에 먹는다.


여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크고 작은 여행을 1년에 두세 번 하다 보니 자랑은 아니지만 나만의 여행 법칙이 생겼다. 여행할 때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비법이 생긴 것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여행지에 하루 전날 먼저 가 있는 것이다.


휴가가 내일부터라면 오늘 퇴근하고 늦게라도 버스나 비행기로 여행지로 가버린다.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숙박비가 아깝다. 예전에 도쿄에 갈 때는 퇴근하고 바로 인천공항에 가서 새벽 비행기를 탔다. 도착 후 돌고 돌아 캡슐호텔에 새벽 4시쯤 도착했다. 보통 숙박은 오후 3시부터 다음날 10시까지니 이미 숙박비의 70%는 버린 셈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외칠 수 있다.


여행 시작.


낯선 천장의 패턴 낯선 이불의 냄새를 맡고 일어난다.

그리고 잠시나마 이전의 내가 아니라 새로 만들어진 나를 만끽한다. 일어나서 씻고 옷 입는 등의 일상적인 일이 전혀 다른 배경에서 진행한다. 만나는 사람도 다르고 해외인 경우는 더욱 긴장되면서도 신이 난다. 낯선 사람들과 거리, 공기를 마시면서 여행을 시작한다는 건 굉장히 즐거운 일이다.


만약 여행을 휴가 아침부터 시작한다면 일단 반나절은 버린다고 생각한다.

첫차를 타고 오전에 여행지에 도착해도 일단 몸이 피곤하다. 배도 고프다. 뭘 먹으면 나른해진다. 결국 숙소에 들어가 좀 쉬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금방 저녁이 된다. 이렇게 하루가 끝나버린다. 그래서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전날 밤에 출발하는 걸 선호한다. 숙박비의 70%를 날린다고 해도 30%가 여행의 새로움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휴가(8월 12~17일)도 비슷한 방식으로 경주에 다녀왔다.(다행히 8.15 코로나 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 12일부터 휴가가 시작이기 때문에 11일 밤 퇴근 후 바로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좌 : 심야버스 우 : 2018 도쿄행 심야(?) 비행기 / 이렇게 휴가 전날 밤 출발하는 걸 선호한다.

맞는 시간대에 있던 프리미엄 버스. 처음 타봤다. 비행기의 퍼스트 클래스를 모방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3만 7천 원의 가격을 생각하면 충분히 멋지다.


가장 좋았던 건 180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접히는 의자와 커튼이다. 이렇게 누워서 갈 수 있다면 수면을 취하면서 갈 수 있다. 게다가 커튼을 치고 난 다음에는 나만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럼 작은 내 방이 생긴다. 신기하다. 얇은 커튼 한 장 두른 것뿐인데 갑자기 외부와 단절되고 나만의 공간이 탄생한다. 안도감이 들고 보호받는 기분이 든다. 사소하지만 굉장히 큰 심리적 장치인 것 같다.


이렇게 3시간 30분 동안 나만의 공간에 누워 이동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안대를 주지 않았다. 이어폰을 주면서도 안대를 주지 않는 건 이상했다. 티켓에도 ‘심야버스’라고 적혀 있는데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안대는 꼭 챙기는 편이다. 하지만 비극적으로 이번에 챙기지 못했다. 실내는 어둡지만 도로 위를 달릴 때 계속해서 가로등 불빛이 눈을 때렸다. 어떻게든 안대가 필요했다.


결국 어떻게 했을까?



...




신고 있던 양말을 벗었다. 살짝 코를 대었지만 다행히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대로 눈에 덮었다. 수업 때 아이들과 놀 때를 대비해서 항상 두꺼운 양말을 신는다. 얇은 양말이었다면 약간의 땀만 머금어도 냄새가 났을 것이다. 맹세하고, 아직 섬유유연제 냄새가 남아있었다. 약간은 향긋한 냄새가 남아있었다.


안심하고 눈에 대고 잠을 청했다. 누가 보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어둠 속에서 소리와 진동만이 내가 여행지에 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이번에도 새벽에 도착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서서히 잠이 든다.


면도하는 방식도 사람마다 다르고 감자탕을 먹는 방식도 사람마다 다르다. 안대 대신 양말을 눈에 덮은 남자는 그렇게 자기만의 스타일로 여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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