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용석 Oct 19. 2023

3화 - 하나도 못 알아 듣다, 언어의 전환

한동안 언어의 산통을 겪다

안녕하세요.

30 대 후반, 9년 가까이 일한 회사를 퇴사한 후 작년 8월에 평택에 있는 삼성 고덕 반도체 현장에서 숙식 노가다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여기서 있었던 일들과 깨달음, 의미 있는 일들을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글들은 매번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베스트 게시판으로 이동했고 많은 응원과 공감의 댓글이 있었습니다.


현재도 지속적으로 연재중이고 이 글에 대한 반응(댓글)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게시글 아래에 댓글이 있으며 브런치 댓글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https://m.clien.net/service/board/use/17824903


이제 이곳에 온 지 4개월이 지났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살아남는다’에 초점을 맞춰 생활했습니다. 무조건 4시 40분에 알람을 맞추고 5시에 일어나고 늦지 않게 출근하는 것에초점을 맞췄습니다.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언어’입니다. 같은 한국이고 같은 한국어를 사용해도 사용하는 언어는 완전히 다릅니다. 주로 사용하는‘언어’의 차이 때문입니다.


제가 연재한 글들의 댓글들 중에서 ”피라미드 건설현장 같다“라는 댓글을 보고 굉장히 공감했습니다.


첫날 현장에 왔을 때 신입이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옆에서 팀장님과 다른 반장님이 앞으로 만들 작품(?)에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팀장님은 재킷 상의 주머니에서 홀더펜(연필심이 물려 있는 펜홀더)을 꺼내 아직 마감하지 않은 바닥과 벽에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몇 개의 철심과 몇 개의 너트가 필요한지 이야기하면서 무언가를그립니다. 이 광경은 흡사 컴퓨터가 없던 과거 이집트에서 정말 인부들이 모래 바닥이나 바위에 필요한 자재들을 그려보는 풍경 같았습니다. 실제로 그 뒤로 피라미드 만큼이나 거대한 건설현장이 보이니이곳이 고대 이집트 건설현장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충격적인건 그분들의 대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분명 한국어였지만 대부분의 단어들이 난생처음 듣는 것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장은 이해하지만 도대체 어떤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는 같은 한국인이어도 외국에 온것과 똑같은 현상을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흔히 커뮤에서 듣던 ‘시마이’와 같은 용어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검사한다’라는 말도 ‘검측한다’라고 표현하고 ‘물건을 쌓다’도 ‘적재하다’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그 외에도 일상에서 보기 힘든 다양한사물들을 외워야 합니다. 충격을 흡수하기 위한 얇은 장판(?)은 보양지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와 관련된 언어로 물건을 감싸거나 보호할 때 ‘보양하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언어체계에서 기존의 사람들과의 괴리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상부작업 해야 하니까 보양지 갖고 와”라고 했을 때 얼어붙어 아무런 행동도,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다시 해석하자면


위층에서 작업해야 하니까 바닥에 깔 얇은 비닐막 가져와 라는뜻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강하고 산업적인 느낌이 나는 단어들이 많습니다. 해체허가서, 추락방지대, 조도확보(밝기 유지) 등... 한문이 많이 들어간 단어들이 많아 처음에는 몇 가지는 고개를 갸우뚱하게됩니다.


오히려 일본어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시마이, 콘크리트, 비계는 커뮤에서만 듣고 여기서는 거의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단어를 쓰면 좀 아재, 노짱(?) 냄새가 날 법합니다. 공구리 대신 수공구, 시마이 대신 작업 종료, 아시바 대신 비계 등으로 사용합니다.


대신 영어를 활발히 사용합니다. 앵글, 벤더, 밴드쇼, 벤더 레퍼런스등 갑자기 ‘잉? 웬 순수 영어를?’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또는 영어와 한국어(또는 한자)를 미묘하게 합성한 단어도 많이 쓰게됩니다. 샵장이라는 단어를 아시겠나요? 샵은 자신이 속한 팀의 공간입니다.


이렇게 한두 달은 언어에 대한 산통을 겪게 됩니다.


<언어를 디자인하라>라는 책에서는 ‘언어는 생각의 옷이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책의 저자도 용접일을 하다가 인문학과 교수님이 되었는데 그때 당시 언어가 바뀔 때마다 스스로의 인생이 송두리째 변하는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확실히 듣는 말이 달라지고 하는 말이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게 됩니다. 이전에 강사를 하면서 사용했던 말들은 설득하고 공감 위주의단어들을 사용했다면 이곳에서는 어떠한 상황을 설명하고 구조적으로 표현하는데 적합합니다.


2층 상부구조에서 왼쪽 위 트레이 상단에 있는 너트가 조금 풀려 있습니다. 일단 말비계 챙기고 보양지와 합판으로 지지한 다음에 14 스패너로 한번 돌려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어떠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어떠한 도구로 상황을 조치할 것인지 설명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다르게 상대방에게(또 사진은 보안상 힘드니) 위치와 상황을 구체적으로 상사하게 됩니다. 또 그걸 여기만의 언어로 재해석해서 말하게 됩니다.


확실히 이곳에서 언어를 새롭게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알아차리지못하게 어느 순간 내가 내뱉는 단어들이 바뀝니다. 이전보다는 좀 더딱딱하고 간결해집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걸 통해 내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도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저는오히려 이걸 굉장히 반갑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전 교육계에 사용하던 용어와 이곳에서의 단어들이 서로 교차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재미있습니다.


예를 들어 비고츠키의 ‘비계 이론’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비계(scafolding)라는 단어 자체가 낯설고 와닿지 않았지만 지금은 수많은 비계공들의 비계로 만든 건축물을 보면서 이론이 생생하게 와닿습니다.


샵장을 통해서 미래에 내가 설계할 새로운 형태의 미술학원의 레이아웃이 그려집니다. 샵장의 특징은 용도에 따라 크기와 형태가 변합니다. 내부에 많은 자재들이 들어오면 그만큼 테두리를 늘릴 수 있습니다. 또 모든 것은 언제든 옮길 수 있게 바퀴가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현장의 일정에 따라 몇 번이나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유연성을 보면서 아이들 교실도 이렇게 유연하게 늘리고 줄일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설명할 때 최대한 구체적인 형태, 그것을 어떻게 자르고 가공해야 하는지, 어떤 공구가 필요한지 구체적인 묘사를 하는 습관이 길러집니다. 또 어떤 도구가 필요한지 미리 알아야 빨리 할 수 있기 때문에 계획적인 말들을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흔히 ‘노가다(일본어죠?)’ 하는 사람들 특징 중 하나는 말이 거칠다입니다. 이 거칠다가 욕설일 수도 있지만 상당히 ‘직설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드라마로만 접했을 때는 힘든 삶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튀어나오는 생각과 언어가 합쳐져서 그럴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현장으로 와 보면 욕설을 하거나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팀마다 분위기가 다를겁니다) 오히려 쌍욕을 했다가는 이상한 사람 취급받거나 누군가 큰 소리로 욕을 하면 갑자기핸드폰으로 녹음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보다는 현장에서는 즉각적인 의사소통이 중요합니다. 공사 일정도 있고 현장 자체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보니 빠르게 지시를 내리거나 즉시 피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 현장의 입체적인 구조에 대해 설명해야 하니 감정보다는 구체적인 사실전파가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거 해, 저거 해, 절대 손대지 마” 등의 말을 사용합니다. 누군가는 이게 굉장히 차갑고 심하게는 교양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현장안에 일하다 보면 가장 합리적인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걸 깨닫습니다. 앞에 전기가 흐르는데 상대방기분 고려하면서 말할 여유는 없기 때문입니다.


뭐든 줄여서 말하고 직설적으로 말하고 빠르게 명령어를 전달하는체계, 군대와도 닮아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입니다. 결국 언어는 거칠어도 사람이 배려심 있고 따뜻하다면 거친 단어 안에서도 따스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떼지 말고 꼭 붙이고 있어. 아무것도 물어보지 말고 그냥 이것만 해. 그냥 해“


누가 보면 굉장히 무례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중에 보니 엄청나게 바쁜 상황이었고 제가 제일 빠르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저를 최대한 배려한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삼성의 배려가 느껴지는 단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인부, 잡역부 대신 삼성에서는 ’기술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처음에 서로를 어떻게 부르지? 라고 생각했는데 이 단어를 보고 상당한 배려심이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삼성 관계자가 인부를 지칭할때 인부라 하지 않고 기술인들이라고 합니다. 우리들 조차 장난으로‘일꾼들’이라 말하는데 삼성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기술인이라는 단어를 전체적으로 사용하게끔 현수막이나 각종 안내판에 표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생색내기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도 서로를 ‘반장님’이라 부르지 기술인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술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공식적인 문서나 현수막에도 우리를 기술을 가진 사람들, 기술인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현실적(법률적)으로는일용직 인부라 할지라도 환경 자체가 기술인으로 불리는 것, 그리고공식적으로 지속적으로 불러주는 모습에서 하나의 배려심을, 그리고스스로 이미지를 높이려 하는 노력이 보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