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와의 관계는 몇 공수일까?
안녕하세요.
30 대 후반, 9년 가까이 일한 회사를 퇴사한 후 작년 8월에 평택에 있는 삼성 고덕 반도체 현장에서 숙식 노가다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여기서 있었던 일들과 깨달음, 의미 있는 일들을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글들은 매번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베스트 게시판으로 이동했고 많은 응원과 공감의 댓글이 있었습니다.
현재도 지속적으로 연재중이고 이 글에 대한 반응(댓글)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게시글 아래에 댓글이 있으며 브런치 댓글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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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친한 후배의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우리나라가 독립 만세를 외친 역사적인 날이기도 하며 모든 직장인에게는 오랜만의 빨간 날 입니다. 일용직 근로자들에게는 놓칠 수 없는 날이기도 합니다. 바로 휴일 수당입니다. 이날은 출근하면 더 적게 일하면서도 2공수 즉, 2배 수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여러분이 어떤 사정에서든지 일용직을 시작하면 스마트폰에 꼭 설치해야 하는 앱이있습니다. 바로 공수 달력입니다. 살면서 다양한 앱을 설치해 왔지만, 이 앱을 설치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공수달력이란 자신이 일한 날을 기록하는 앱입니다. 매일매일 주간 근무(1공수)를 했는지 연장(1.5)했는지, 조퇴(0.5)를했는지를 기록합니다. 매일 자신이 일한 시간을 기록합니다. 그럼 이걸 왜 하느냐, 바로 회사와의 기록을 대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일반 직장에서는 자신의 일당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모든 월급은 말 그대로 한 달 단위로 나오고 휴가도 유급휴가이기 때문에 월급에서 차감된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하지만 일용직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 일급을 받는 형태입니다. 그걸 한 달동안 모아서 회사에 청구하고 회사는 월급의 형태로 지급합니다. 또 일용직은 유급휴가도 병가도 없습니다. 그저 그날 일하면 받는 거고 일하지 않으면 받지 않습니다.
때문에 일반 직장인들보다 급여의 폭이 상당히 유동적입니다. 일주일간 아파서 쉰 달과 매일 조출, 야간을 일했던 달의월급은 두 배 이상 차이 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회사의 기록과 자신의 기록을 대조해 봐야 합니다.
이런 유동성을 회사에서 미처 기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팀장도 팀원들이 조퇴하기도 하고 지각하기도 하면서 공수가 뒤죽박죽되면 팀원의 공수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개인이 잘 기록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회사가 지급한 월급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걸 선배는 간단히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선 누구도 믿지 마세요. 여긴 정글이에요”
그런 이유로 여러분은 매일매일 공수를 기록해야 합니다. 업체마다 다르지만 보통 15일에 중간 정산, 말일에 정산 2회씩진행합니다. 이때 0.1공수라도 빠져 있으면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월급 지급까지 진행되면 되돌릴 수 없어서 자신의 공수는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매달 두번씩 체크하는 공수. 회사의 기록과 자신의 기록을 대조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매일매일 자신이 얼마나 일했고 얼마나 벌었는지 기록할 수 있습니다. 일반 직장인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작업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미묘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초반에 두어 달은 만근을 하면서 열심히 출근했습니다. 하지만 피곤할 때도 있고 아파서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주 6일, 평균 12시간씩 일하다 보면 여러분은 필수적으로 한두 번은 쉬면서 친구들을 만나거나 경조사 참석 등 사회관계를 유지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팀장님에게 미리 쉬는 날을 이야기하면 대부분은 허락해 줍니다.
초반에는 쉬고 싶은 날을 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아파서 쉬기도 하고 순수하게 글을 쓰기 위해 쉬기도 했습니다. 또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도 쉬었습니다. 공수 달력에 매일 자신이 일한 공수를 기록하면 자동으로 세금을 제외한 금액으로환산해 줍니다. 쉬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맞습니다. 그날은 아무것도 기록할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공친 날‘이 되는 겁니다.
공수달력 화면. 많이는 근무한 날, 많이 쉰 날이 그대로 나옵니다. 자기도 모르게 얼마를 손해봤는지 계산하게 됩니다.
어느 순간부터 공수 달력을 보면서 매일매일 얼마를 벌었는지 계산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친구들과 만날 때도 어느새’잠깐, 이번 주 쉬면 일당이 빠지는데‘ 라고 생각합니다. 나도 모르게 친구와의 만남을 일당 금액으로 환산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마음먹었던 ’공수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쉬기‘ 라는 목표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심지어몸이 아파도 ’오늘 하루 쉬면 날아가는 공수가 대체 얼마야?!‘ 라든가 친구가 만나자고 해도 ’친구 한번 만나는데 1공수를투자한다고?? 그 정도로 친하지 않은데..‘ 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얘기를 들은 룸메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드디어 형님도 공수의 지옥에 빠지셨군요. 공수 지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도 날아가는 일당 때문에 만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쉴 때는 좋습니다. 하지만 월말에 다른 사람과총 공수를 비교해 보면, 또 내가 받을 월급을 계산해 보면 많이 쉴수록 우울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친구들과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1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도 ”너희 만나려고 조퇴해서 1공수 비치고 여기에 왔다“ 라고 생색냅니다. 속으로는 그만한 금액을 이미 써버렸다는 후회 감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친구들과 밥 한번 먹는데 이미밥값 + 일당이 포함해서 계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혼식도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주 6일 토요일까지 일하는 이곳의 특성상 토요일에 빠지게 되는데 1공수 + 축의금까지 하면 꽤 쓰라린 금액을 지출합니다.
게다가 3.1절과 같은 휴일에 지인의 경조사에 참석하면 2공수(심지어 2시에 퇴근)+축의금으로 하면 상당한 이중지출을감수해야 합니다. 후배는 이전에도 묻습니다.
”우리 관계는 몇 공수에요?“
”1공수는 무난하고 1.5공수까지는 음.. 오케이.. 근데 2공수는 좀.......“
뭐 이런 웃픈 대화가 오갑니다.
팀 내에서 매일 기침을 달고 사는 분이 계십니다. 주변에서 좀 쉬고 병원에 다녀오라 합니다. 하지만 그분이 빚이 있다는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쉽사리 쉬는 걸 강권할 수 없습니다. 돈 때문에 아파도 쉬지 못하는 현상, 공수 지옥의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흔히 TV 드라마를 보면 일용직 주인공이 어느 날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 장면을 봅니다. 철없을 때는 ‘그러게좀 병원 좀 진작 다니지 ’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막상 직접 겪어보면 직장인 때의 ‘잠깐 시간 내서 병원 다녀오기’가 절대쉽지 않다는 걸 깨닫습니다. 비염 때문에 병원 한번 가려 해도 반나절은 통으로 날려야, 즉 0.5공수는 바쳐야 가능합니다.
물론 점심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도덕의 점심시간은 2시간입니다. 누군가는 ‘와 2시간이면 충분히 개인 볼일보겠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고덕 반도체 공장은 하나의 도시입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넓습니다. 2시간인 이유는 1시간은 거진 이동하는 데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바로 옆에 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중교통이나 차량을 이용하면 또 수반되는 시간을 계산해야 합니다. 차라리 점심을 거르고 쉬는 걸 택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병을 키우는 사례도 많습니다. 같은 팀 형님이 잔기침하고 아픈 기색이 있어 몇 번이나 병원에 다녀오라고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결국, 독감으로 발전하고 1주일간 쉬게 되었습니다. 1공수로 막을 수 있던 걸 몇 배의 공수를바쳐야 하는 대가를 치른 것이지요.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일반 직장인은 연차를 내서 친구들과 놀러 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용직 노동자에게는 쉬는날이 곧 돈이기에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족들과 여행도 좋지만 어떤 행동에 +공수라는 생각이 계속 따라다닙니다.
이러다 보니 쉬는 날도 최대한 주말이나 공수가 적게 나오는 날로 선택하려 합니다. 2공수인 날은 어떻게든 피하려 하고1공수만 나오는 날을 고릅니다. 만약 쉬고 있는데 그 날 연장, 야간을 했다 하면 쉬면서도 아쉬워지는 서글픈 자신을 보게됩니다.
다시 빨간 날 이야기를 하면 직장인에겐 소중한 휴일이지만 일용직 노동자들에겐 절호의 기회이자 쉬려야 쉴 수 없는 날입니다. 특히 식당이 쉬게 되면 노동자들이 식사할 수 없으므로 OT, Over Time을 실시합니다. 휴일에는 보통 점심시간2시간 포함 4시까지 일하는데 2시간 점심을 건너뛰는 대신 2시에 업무를 끝냅니다. 휴일에 잠깐 뭘 하면 점심은 금방 지나갑니다. 그때 출근한 사람은 평소보다 덜 일하고 훨씬 많이 받습니다.
예를 들어 일당이 14만 원이라면 28만 원이 됩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점심 즈음까지 일하는 대가로 28만 원을 받는 거라면 상당히 매력적인 조건입니다. 이러니 빨간 날에 근무를 안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지난 3월 1일 지인의 결혼식. 며칠 전 팀장에게 지인의 결혼식으로 결근한다 말했습니다. 일반 회사였으면 “다들 바쁜데왜 빠지느냐?” “꼭 중요한 약속이냐” 라고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다른 의미로 그만큼 중요하냐고 물어봅니다. 2공수를 포기하는 것인 만큼 중요한 일이냐는 뜻이지요. 회사의 이익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이익 때문에 공수를포기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2공수의 결혼식은 참 빨리 끝났습니다. 점심 뷔페를 먹으면서도 ’지금쯤이면 다들 퇴근하고 2공수 받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신이 참으로 처량해집니다. 장난기 넘치는 형님에게 전화가 옵니다.
“2공수 자리 뷔페 어때? 아니다. 축의금까지 하면 4~50만 원짜리 뷔페겠구먼” 하고 놀립니다.
일반 직장인 친구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큰 결심을 해야 했는지 그 누구도 알지못할 겁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사람의 관계를 돈으로 계산하다니 정말 너무하네’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이 위치에 와보지 않는 이상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며칠 뒤 한 사람이 저에게 연락해옵니다. 바로 그 결혼식 당사자입니다. 그 지인의 남편분도 구덕에서 일한 경험이 있기때문에 제가 그 날 참석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감사했다고 합니다. 본인들도 제가 일당을 포기하며 왔다는 걸 이미 인지하고 있었고 거기에 축의금까지 내며 왔다는 것에 ‘제가 어떠한 대가를 치렀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럴 때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재미있는 습관이 생깁니다.
바로 한정된 시간 내에서 최대한 많은 경험을 뽑아내려고 합니다. 오전을 쉬게 되면 병원도 가는 겸 은행도 들립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루를 쉬게 되면 어떻게든 이런저런 일을 하려 합니다. 일반 직장인들도 비슷하겠지만, 그 간절함에는 일용직이 더 강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온전히 쉬는 것, 온전히 한 가지 일만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경조사에 참석하고 나면 꼭 근처 미술관을 갑니다. 구덕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문화생활입니다. 그렇다고 1공수를 포기하면서 한가하게 미술관을 갈 정도로 여유롭거나 미술을 누리지는 않습니다. 대신 이럴 때 가는 미술관, 전시회는 개인적으로 소중합니다.
카페를 가도 어떻게든 그 시간을 온전히 만끽하려 합니다. 스마트폰은 방해금지 상태로 하고 거리의 사람들을 보며 커피한 모금 마십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일상의 행위가 여기서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행위입니다. 그저 친구를 만나는 것, 개인적인 시간을 내는 것, 가보고 싶은 전시를 보는 것, 이 모든 행위는 공수를 포기해야 얻을 수 있는 경험들입니다.
비단 고덕에 일하는 사람의 문제는 아닙니다. 공수 지옥은 오늘날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모두 행당됩니다. 배달하거나 택배와 같이 건수로 성과보수가 정해지는 영역도 그렇겠지요.
어릴적에는 ‘내가 한 만큼 일을 가져간다’에 많은 환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자유주의 사회처럼 내 능력에 따라 내 위치가정해지는 것에 대한 정의감,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막상 철저하게 능력제로 가져가는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일단 내 몸이 계속 일만 하다 보면 분명 아플 때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야간으로 2공수씩 벌어대면 처음에는 좋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우울증이 찾아옵니다.
오늘날 어떤 회사들은 작은 기본급 + 높은 성과보수를 자신의 능력에 따라 연봉 1억도 가능하다고 홍보합니다. 많은 젊은사람들이 혹해서 그곳에 들어갑니다. 이내 깨닫습니다. 그 조건은 나를 위한 조건이 아니라는 걸 말이죠. 불가능하지는않지만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고덕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덕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습니다. 매달 적게는 3, 400, 많게는 7, 800을 번다고생각합니다. 누군가 찍어 올린 공수 달력을 보면서 ‘저기서 몇 년만 일하면 얼마를 모으는 거야?!‘ 환상을 품습니다. 바로능력제에 대한 환상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돈을 모을 수는 있습니다.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또 많은 젊은 친구들이 이런 생각으로 들어왔다가 금방 나가기도 합니다. 누구도 치러야 하는 대가를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시간입니다. 이곳에서 여러분은 철저하게 시간을 ’돈 주고‘ 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내 일당을 바쳐야 하고 잠시 쉬는 것도 결국은 돈을 주고 사야 합니다. 일용직 근로자를 비롯한 인센티브 업계, 자영업자분들 모두 공감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공수 지옥을 탈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소중한 사람의 경조사를 챙기는 것,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이곳에서 더욱 특별한 이유입니다. 혹시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공수를 바치며 축하하러, 애도하러, 함께하러 당신과 함께 있다면 조금은 감사함을 표시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