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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석 Oct 19. 2023

9화 - 슬로우 다운

슬기로운 슬로우 다운 생활

안녕하세요.

30 대 후반, 9년 가까이 일한 회사를 퇴사한 후 작년 8월에 평택에 있는 삼성 고덕 반도체 현장에서 숙식 노가다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여기서 있었던 일들과 깨달음, 의미 있는 일들을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글들은 매번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베스트 게시판으로 이동했고 많은 응원과 공감의 댓글이 있었습니다.


현재도 지속적으로 연재중이고 이 글에 대한 반응(댓글)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게시글 아래에 댓글이 있으며 브런치 댓글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https://m.clien.net/service/board/use/18064741


슬로우 다운

23년 5월, 삼성이 -95%라는 엄청난 적자를 보면서 몇달전부터 거의 모든 공정에서 슬로우다운, 즉 공장 짓는 속도를 늦추기로 했습니다. 사실 삼성뿐만 아니라 전 세계 경제가 슬로우 다운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95%라는 수치도 사실상코로나 특수로 인한 매출을 올린 것이라 비교 자체가 무의미 하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유튜버 슈카 방송을 봐도 엄청난 현금으로무차입 경영(대출 없이 사업)을 하던 삼성이 오히려 대출을 받아가며 공격적으로 5배럭(5번째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증권가 소식을 봐도 반도체 산업은 사이클이 있고 지금은 잠시 소강상태일 뿐이다 하는 관점도보입니다.


그럼에도 현장의 분위기는 춥습니다. 일단 작년 11월 즈음과 비교에 사람이 굉장히 줄었습니다. 뭐든 고점에 물렸다라고하지요, 작년 말 까지만 해도 고덕 하면 원화 채굴의 성지랑 불렸습니다. 전국에 있는 노가다인들과 조선소의 인력들이모여들었습니다. 여기에 주식, 코인 갤러리에서도 ‘물리면 고덕으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습니다. 7시 업무 시작에 6시에 도착해도 게이트 통과만 20 분 넘게 걸린적도 많았습니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한산합니다. 특히 주 6일이 기본이었는데 일을 줄이면서 주5일로 전환한 업체들이 많아졌습니다. 토요일에 가보면 ’우리만 출근하나‘ 싶을정도로 조용하고 쾌적(?)해졌습니다.


일이 줄어들다 보니 그만큼 공수도 줄어들었습니다. 저와 같은 숙소를 생활하는 타업체 분은 아예 연장 없이 오로지 1공수, 주 5일만 근무한지 3개월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최근에 다시 주말 근무가 생기긴 했지만 과거의 영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공수입니다.


보통 연장 하면서 공수가 빠르게 늘어납니다. 연장이 없고 주 5일만 한다면 한달에 20공수 밖에 안됩니다. 여기에 기본일당을 곱하고 세금을 떼면... ’이렇게 일하려고 내가 고덕까지 왔나‘ 현타를 느낄 정도의 급여를 받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분들이 그만두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혼이기 때문에 누구를 책임질 필요가 없지만 가정이 있으신 분들이나 매월 막대한 이자를 내고 있는 분들에게는 가혹한 시기일 수 있습니다.


같이 생활하시는 분도 가정에 보내는 돈이 지난번보다 -100, 200만원 줄어들자 집에서도 ’꼭 거기 있어야해?‘ 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아예 와이프 분께서 ’주말에 쉬지 말고 차라리 쿠팡에 가는 건 어때?‘ 라고 말하기 까지 했다는 소문도 들립니다. (결국은 주말 근무를 하는 다른 현장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어떤 분도 너무나 줄어든 공수에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그래도 숙식이 무상으로 제공되니 조금만 아끼면서 생활하면 어떨까요 라고 물었지만,


“저만 아끼면 뭐하나요... 집에서는 그러지 않는데”


라고 하며 씁쓸한 미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말 알바를 시작한 분들도 많이 보입니다. 편의점 알바나 쿠팡캠프, 배민 배달 등 말이지요. 여기서는 쉬는것이 또 하나의 죄가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줄어든 공수로 투잡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여기 온 대부분이 돈을 바라고 왔기 때문에 목적이 흔들거리자 당연히 이곳에 온 이유도 흔들리기시작한 것입니다. 가장 큰 손해를 보는 분들은 작년 말 이곳이 계속 일거리가 넘쳐날 줄 알고 대출을 받아 이곳에 주택을구입하거나 전세를 들어가신 분입니다. 일은 줄어들고 금리는 오르니 월급의 절반 이상이 원금이자로 나가버리거나 심하면 생활비조차 위협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괴로운 시기입니다. 여기에 가스비, 전기비도 오르니 어떤 팀장은 숙식하는 팀원들에게 어쩔 수 없이 월세를 걷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또 어떤 분들은 셋이서 아파트 월세를 얻었다가(월세가 높습니다) 한분이 나간다고 하자 월세를 둘이서 나눠 내야 하는데 굉장히 부담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으론 일이 없는 시기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작년에는 조기 출근에 연장, 야간까지 하며 인간다운 삶을 내려놓고 돈을 벌다가 갑자기 9-6 직장인, 공무원이 되어버렸습니다. 재미있는 건 시간이 남아돌자 주변에서 보이는 삶의 변화입니다.


주 5일에 7-5, 직장인들 눈에는 너무나 평범한 삶의 패턴이지만 이곳 노가더들에게는 평소에는 경험하기 힘든 삶의 패턴입니다. 이런 말을 하면 조금 무리가 있지만, 수용소 생활에서 자유민의 삶으로 돌아왔다고 해야 할까요. 가장 큰 변화는사람들이 취미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어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악기를 조금씩 배우기시작합니다. 또 항상 연장, 야간에 퇴근하던 사람들이 이제 저녁에 시간이 남기 시작하자 맛집 탐방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녁 이후의 삶’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지요.


시간이란 참 신기합니다. 돈을 벌게 해주기도 하고 이렇게 삶의 여유를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과거 학원 선생님이었을 때원장님과 합의해서 주 4일을 일한 적도 있습니다. 월급은 적었지만 그 당시 받던 스트레스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던 경험을 했습니다.


미술학원에 9년 가까이 일했던 것도 주 4일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만둘까 싶을 정도의 스트레스가 쌓이다가도 주3일을 쉬고 나면 금세 다시 수업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선생님 한분이 그만두면서 다시 주5일을 일하기 시작했을 때, 엄청난 스트레스와 피곤함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주 6일을 일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인간관계의 많은 부분이 사라졌습니다. 매주 나가던 독서모임은 아예 불가능해졌고 평소 지인과의 카톡도 너무나 피곤해서 대부분 피상적으로변하고 결국은 끊키게 되었습니다. 참 슬픕니다. 자신의 인생을 그대로 돈과 맞바꾸는 기분입니다. 친구들이 ’아 나도 고덕으로 갈까‘ 라고 하며 자신의 현재 직업을 한탄할 때 지금 너의 네트워크 절반 이상이 끊킨다고 생각해 보라고 권합니다.


슬기로운 슬로우 다운 생활

이런 와중에 주변에서 보이는 다시 주 5일로의 변화, 단 하루의 여유가 보여주는 삶의 변화들은 흥미롭습니다. 표정에는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남는 시간에 이전에 할 수 없던 새로운 시도를 하는 모습들이 신기합니다. 삶에 빈 공간이 생길 때 그곳에 무엇을 개인마다 다채롭게 채우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분명 과거 주 5일 할 때 있을 법한 모습이지만 여기서 다시금 주 5일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 주 6일을 일하던 부모님이 생각납니다. 우리의 기억에는 매일 TV만 보고 나가기 귀찮아 하던 아버지 세대가 떠오릅니다. 어머니는 어디든 그렇게 가자고 해도 귀찮아하고 멀리가기 싫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주6일을 일하면 똑같이 행동할 거라는 걸 깨닫습니다. 그런 아버지들이 주 5일, 4일을 일해도 똑같았을까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가족들과 새로운 시도를 했을 테고 더 풍족한 삶을 살았을것입니다.


세상은 여기서 한발 더 앞서나갑니다. 이제 주 4일을 이야기 하기 시작합니다.  개인적으로 주 4일을 몇년전에 미리 해본 결과, 근속연수는 당연히 늘어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돈을 소비합니다. 월급은 적었지만 행복이라는관점에서는 최고 수치였지 아닐까 싶습니다. 게다가 기업에서는 월급을 줄이지도 않고(!) 주 4일을 계획하고 있다니 직장인 입장에서는 최고의 축복이 아닐까 합니다.


지난번 글에서 AI가 아직은 이곳을 점령(?)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두달이 지난 지금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점령당하고있는게 보입니다. 굳이 클리앙이 아니더라도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온갖 종류의 자동 생성 툴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렇게 빠르게 세상이 변하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우연히 친구들과 들린 파스타집에는 이미 서빙 로봇과 키오스크로2명의 종업원이 수십명의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1~2년 안에 기본소득이 실시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때가 되면 지금 고덕의 슬로우 다운 모습의확장판이 보여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군가는 투잡, 쓰리잡을 할 테고 또 누군가는 적게 벌지언정 하고 싶은 공부나 악기를 배울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결국 현실에 대응하는 우리의 자세일 것입니다. 슬로우 다운이 꼭 인생의 슬로우 다운이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생긴 소중한 시간, 매일의 빈 공간을 소중한 것으로 채워가는 게 가장 지혜로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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