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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석 Oct 19. 2023

7화 - 두 계단 위에 서 있는 사람

인생에는 부모, 선배와는 다른 존재가 필요하다.

안녕하세요.

30 대 후반, 9년 가까이 일한 회사를 퇴사한 후 작년 8월에 평택에 있는 삼성 고덕 반도체 현장에서 숙식 노가다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여기서 있었던 일들과 깨달음, 의미 있는 일들을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글들은 매번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베스트 게시판으로 이동했고 많은 응원과 공감의 댓글이 있었습니다.


현재도 지속적으로 연재중이고 이 글에 대한 반응(댓글)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게시글 아래에 댓글이 있으며 브런치 댓글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https://m.clien.net/service/board/use/17878405



고덕에는 다양한 직종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힘들어 보이는 직종 중 하나는 비계팀일 것입니다. 비계, 영어로scaffold는 임시로 사용하는 계단을 말합니다. 철골로 된 발판과 기둥으로 임시 구조물을 제작합니다.


출처 : https://www.cuttingtechnologies.com/scaffolding-systems/


이 비계라는 단어는 일반인들이 평소 듣기에 굉장히 낯선 단어입니다. 하지만 교육학을 공부해 본 사람들은 한 번쯤은 비고츠키의 교육이론에서 들어봤을 것입니다.


비고츠키의 근접발달영역(ZPD) 이론에 나오는 단어가 바로 비계입니다. 아주 간단히 설명하면 아이의 교육은 높은 사람보다 한두 레벨 위 사람이 가르치는 게 훨씬 효과가 크다고 합니다.


흔히 아이들을 보면 선생님이나 부모가 가르쳐 주는 것보다 1~2살 위의 형, 누나가 가르쳐 줄 때 훨씬 잘 배웁니다. 특히남자아이들의 경우 선생님에게 까불거리고 떠들던 아이도 형을 보는 순간 군대처럼 바로 서열 정리가 들어갑니다. 신기하게 형이 하는 말은 빼놓지 않고 잘 듣습니다.


이곳에서 완전히 기초지식이나 경험 없이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많이 혼나기도 하고 적응하기 힘들어 다시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 또한 처음 왔을 때 아무리 동생들과 팀장이 알려준다 해도 단어조차도 이해 못 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매일 일과를 끝마치고 ‘내가 여기 왜 있을까’ 한숨이 나오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보다 3살 위 형님 한 분이 들어왔습니다. 그 형님은 저보다 후임(?)이지만 이미 관련 업종에 경험이 있어 빠르게 적응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오히려 저에게 다양한 도구나 중장비 사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형님을 통해 이전보다 훨씬 빠르게 업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이전에도 팀원들이 시범을 보여주었지만 이상하게 저보다 몇 살 위 형님의 가르침이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불장난을 해본 적이 있나요? 어릴 적 동네에는 부모님이 하지 말라하는 것만 골라서 같이 장난치는 소위 ‘동네 형’이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몰래 불장난을 알려주거나 놀이터에서 한밤중에 불꽃놀이를 한다거나 난간 바깥으로 걸어 다니면서 아슬아슬하게 등교하는 법을 알려주는 형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당연히 ’그 형하고 놀지 말아라 ‘라고 경고하는 그런 존재 말이죠. 하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같이 놀고 싶어지는, 절대로 집이나 또래 친구들에게서 얻을 수 없는경험을 하는 형들이 좋았습니다.


그때의 기분이 들었습니다. 형님은 이미 다양한 도구에 관한 지식들을 알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교육을 들으러먼 길을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원 이미지 출처 : https://m.blog.naver.com/malname32/221574309591)


대략 1번 지점에서 2번으로 이동해야 하는 꽤 먼 거리였습니다. 사실 자전거도 서툴고 전동 킥보드도 한 번도 타 본 적이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안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1시간 동안 걸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형님이 제안했습니다.


“우리 킥보드 타고 가보자”

“형, 킥보드 한 번도 안 타봤고 위험해요”

“정말 한 번도 안타본거야? 내가 알려줄게”

“아.. 모르겠다”


형은 저에게 공유 킥보드 앱 설치부터 타는 법 까지 전부 알려주었습니다. 무엇보다 처음 킥보드를 타는 저를 대략 20미터 정도 앞서 가면서 멈추고 뒤를 바라봐 주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타다가 내리고 아예 손으로 밀고 가는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짜증내기는 커녕 “자, 발을 직선으로 하고 균형을 잡아봐” 하면서 계속 알려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형은 4킬로가 넘는 거리를 계속 조금씩 앞서가다 멈추면서 뒤에서 제가 제대로 따라오고 있나 빼꼼히 뒤돌아봤습니다. 멀리서 조그맣게 킥보드를 탄 실루엣이 참 웃기면서도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교육장까지 힘들지만 재밌게 올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여기서 형을 만났구나’라는 생각을 들었습니다.  


인생 선배와 형과의 다른점

형이라는 존재는 실로 오랜만이었습니다. 아동 미술 교사로 활동하면서 항상 저보다 어린 선생님을 만나왔고 원장님은저 위의 존재였습니다. 군대에서 장교로 활동하면서 많은 선배들을 만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직급상 선배였고 동갑이거나 어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참 좁게 살아온 인생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냥 인생에서 좋은 선배 만난 거 아닌가?’


맞습니다. 다만 좋은 선배와는 어딘가 다릅니다. 좋은 선배는 배우고 싶은 점들만 있고 우러러 본다면 형은 함께 실수도 하고 웃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는 존재입니다.


단순히 나이만 많아서는 안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저에게 새로운 시야를 보게 해줘야 합니다. 특히 지식이 아닌  인생에서 구체적인 경험담을 알려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너무 일을 잘하거나 또는 너무 높은 인생의 깨달음(?)을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함께 실수도 하지만 저에게 인생의 새로운 관점과 경험을 전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중에 주택 청약을 이용해서 어떻게 집을 구입해야 하는지, 여자친구와 신혼집을 어떻게 구하는지 등 딱 제 나이에필요한 정보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교회에 다니느라 술을 멀리하는 저에게 ‘생각나서 사봤다.’ 하면서 과일주를 선물해 주거나 여성을 꼬실 때 좋다는 작업주 제조법도 알려주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지식들과 경험을 배우며 깊은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어릴 적 두근거리며 예상치 못한 모험을 떠날 때의 느낌이 듭니다. 사실 인터넷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습니다. 바로 ‘삼촌이 최고야’ 짤입니다.

(꼭 엄마가 금지하는 것만 사먹이는 삼촌, 제가 이제 조카를 그렇게 인도해야 할 나이가 되었네요^^;)


고민 아줌마, 고민 아저씨

재미있는 건 이걸 제도화시킨 나라도 있습니다. 교육 강국인 영국에서는 일찌감치 이러한 삼촌의 존재를 교육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보육사 교육 과정에는 ‘부모 외에 다른 어른을 만나게 하는 것‘에 대한 과정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직업을 가진 어른들을 초대하고 질문하게 하고 고민상담을 진행하는데,  일명 Agony Aunt, Agony Uncle, 즉 고민 아줌마, 아저씨입니다. 혈연관계를 떠나 부모님처럼 너무 가깝지 않고 너무 멀지 않은 거리를 유지할 수있는 존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일본의 교육자 나오쿠사 준이치는 ‘아저씨(삼촌)‘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립니다.

“어느 날 문득 부모의 가치관과 사상에 갇혀 있던 소년에게 나타나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존재, 그것이 아저씨입니다.”


"부모나 사회가 알려주지 않는 것을 같이 놀면서 알려주는 사람. 그것이 아저씨입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형을 만나는 건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다들 인생의 고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어릴 적 부모님의눈을 피해 불꽃놀이를 하는 시절은 지났습니다. 누구도 이제 저에게 ‘쉿, 엄마한테 비밀이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형님과 함께 교육 수업을 듣기 전에 햄버거 가게에 들렀습니다. 함께 햄버거를 먹으며 문득 하늘을 봤습니다. 너무나 매섭게 추웠지만 청량하고 맑은 하늘이었습니다. 순간 행복의 조건 중 하나가 이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한두 계단 위에서 저 너머에 재밌는 게 있다고 빨리 와보라고 재촉하는 존재,

나보다 몇 걸음 먼저 가보고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는 존재,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같이 낄낄대며 해보는 존재,


그런 사람과 함께 할 때 삶은 좀 더 충만해지는 걸 늦은 나이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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