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는 것들을 미루면 결국 중요한 것만 남는다.
안녕하세요.
30 대 후반, 9년 가까이 일한 회사를 퇴사한 후 작년 8월에 평택에 있는 삼성 고덕 반도체 현장에서 숙식 노가다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여기서 있었던 일들과 깨달음, 의미 있는 일들을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글들은 매번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베스트 게시판으로 이동했고 많은 응원과 공감의 댓글이 있었습니다.
현재도 지속적으로 연재중이고 이 글에 대한 반응(댓글)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게시글 아래에 댓글이 있으며 브런치 댓글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253832
이전 글에서 말했듯이 너무나 허무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살을 빼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처음에 잠을 잘 자기 위해 먹지 않았던 저녁을 아침으로 옮겼을 뿐인데 몇 년간 시도했던 어떤 다이어트보다 효과적이었습니다.
잠을 자려면 수면 시간을 늘려야 한다.(일찍 자야 한다)
잠을 잘 자려면 속이 편해야 한다(저녁을 거르고 아침을 든든히 먹는다)
고덕의 노가다 생활에서 이 두 가지 삶의 지혜를 얻은 것이 정말 기뻤습니다.
이후에 계속해서 아침은 든든히, 저녁은 거르거나 간단한 샐러드나 과일 몇 조각을 먹었습니다. 때로는 너무 효과가 좋아 62kg까지 몸무게가 줄었으나 오히려 걱정되어 다시 먹어서 체중을 늘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대로 몸을 조절하게 되자 삶의 자신감이 늘어났습니다.
내 삶을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이 이전보다 삶을 조금씩 행복하고 힘차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온갖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것들이 알고 보니 너무나 단순한 법칙만 지켜도 저절로 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습니다.
특별한 약을 산 것도 아니고 비싼 다이어트 식품을 먹는 것도 아니고 그저 먹는 양을 줄이면 살이 빠지고 수면시간을 늘리면 개운해진다는 사실 자체가 삶의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았습니다.
그 뒤로도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숙소에 있는 오븐을 이용해 스테이크를 해먹기도 하고 전날 먹고 싶었던 치킨, 라면들도 모두 아침에 먹었습니다. 이러한 생활을 하면서 얻은 몇 가지 깨달음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처음 이 생활을 하면서 제 자신은 좋았지만 룸메이트에게 몹시 미안했습니다. 룸메이트는 저와 함께 밥 먹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 친구도 초반에 홀로 지내면서 혼자 밥 먹고 수많은 사람들이 숙소에 왔다가 그만두며 떠나는 경험을 일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의외로(?) 오래 이 생활을 버티고 무엇보다 여러 시도들을 하면서 삶을 변화시키는 모습이 좋았나 봅니다. 항상 저에게 ”형님을 보면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게 돼서 좋아요. 매번 이곳에서 비슷한 사람들 보다가 형님을 만나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워요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야간 근무를 끝내고 같이 야식을 먹는 일이 잦았는데 어느 순간 제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일찍 자버리니 아쉬워하는 모습을 자주 봤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법칙을 정했습니다. 바로 매주 수요일은 치팅데이로 정한 것입니다.
수요일인 이유는 보통 업체들이 가정의 날이라고 해서 수요일은 연장을 하지 않고 주간근무만 하기 때문에 일찍 끝납니다. 그래서 연장이나 야간근무를 하는 날보다는 먹는 시간이 훨씬 여유롭습니다.
특히 이런 간헐적 단식을 계속하면 부담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치팅데이를 통해 식욕에 대해 적절한 탄력을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 치킨을 먹기로 했다면, 월요일부터 룸메이트와 함께 어떤 치킨을 시킬지 고민합니다. 마치 군대 훈련소에서 휴가 나갔을 때 먹고 싶은 음식을 나열하는 것과 비슷한 간절함으로 음식을 바라보게 됩니다.
월요일부터 “이번주에는 네네 치킨을 먹자”라고 말하면서 일하는 중간중간에도 룸메이트와 “일단 순살 양념을 시키고 사이드 메뉴로 뭐 먹을까?”라고 하면서 계속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참 웃긴 풍경입니다. 얼마든지 퇴근 후에 당장 시켜 먹을 수 있음에도 일주일에 단 한 번으로 기회를 제한하자 음식의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룸메이트도 제 영향을 받아 평소 저녁을 간단히 먹기 시작하자 수요일 치팅데이에 대한 기대치는 더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형, 제가 진짜 맛있는 집 알아놨어요 “
“이제 하루만 더 참으면 피자를 먹을 수 있어”
매주 수요일 치팅데이, 수용소에 갇힌 사람처럼 일주일동안 무얼 먹을지 행복한 고민을 합니다.
이런 식으로 출근하면서, 일하면서도 하루하루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이런 간절한 마음으로 배달음식을 대하면 먹었을 때의 기쁨도 다릅니다. 서로 환호성을 지르고 피자박스를 언박싱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셨는지요. 리뷰 이벤트로 받은 새우튀김과 초밥을 두고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셨는지요. 아무리 돈이 있다 한들 스스로 음식을 제한하지 않으면 이런 기쁨과 충족감을 맛보긴 힘들 것입니다.
보통 다이어트라고 하면 식단 절제와 맛없는 닭가슴살과 샐러드만 계속 먹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저 한 끼를 안 먹게 되면 굳이 닭가슴살 샐러드를 먹지 않아도 됩니다. 특히 힘들게 일한 날일수록 식욕보다는 수면욕이 더 강해집니다. 야간 근무를 끝내고 돌아오면 밤 10시가 넘습니다. 그때 편의점 도시락으로 때우기보다 깔끔하게 샤워하고 바로 자버리는 게 더 쉽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먹고 싶었던 햄버거, 라면을 먹는다 한들 살이 찔 수가 없습니다. 이미 전날 저녁을 먹지 않았기에 필요한 칼로리들은 내 몸 지방에서 조달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문적인 지식은 아닙니다. 다만 인바디와 눈바디(?)로 제 뱃살을 측정해 봤을 때 내린 결론입니다.)
실제로 저녁을 건너뛰고 아침마다 라면, 치킨, 유부초밥, 햄버거를 먹었습니다. 그저 퇴근하고 먹고 싶었던 것들을 아침에 든든히 먹어도 체중이 올라가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크푸드만 먹기에는 너무 물려서 샐러드나 과일과 함께 먹었습니다.
이후에 마이크로 바이옴(몸속 미생물)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정크푸드 비중을 줄이고 과일과 야채 비중을 높였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것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먹었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실컷 먹고 하는 다이어트, 과대광고 멘트가 아니라 전날 저녁을 먹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새벽 4시의 스테이크.. 이제는 숙소 오븐을 이용해서 제법 정성껏 요리하고 아침을 먹습니다.
제 삶에 가장 큰 도움이 된 부분입니다. 연장, 야간 근무를 끝내고 돌아올 때 스스로에게 뿌듯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피곤하고 허기질 때 가장 먼저 ’ 스스로에게 주는 상‘은 당연 히 음식입니다. 게다가 연장으로 추가 수당도 벌었으니 누구나 배달음식을 생각합니다. 실제로 예전에 6인 숙소를 사용할 때는 몇몇 기술인들 방 앞에는 거의 항상 배달음식 박스가 쌓여있었습니다.
지금 당장 ’너무 배고파 ‘라는 외침 앞에서 욕구를 지연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매번 유혹에 넘어가 밤늦게 먹은 야식들은 다음날 불쾌한 더부룩한 감각만 있었습니다. 잠을 잘 자기 위해 이러한 욕구를 아침으로 넘기는 연습을 하면서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유혹을 넘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절대 안 되는 게 아니라 다음 날 아침에 먹는 것뿐이야’
대부분 다이어트를 실패하는 이유는 ’절대 먹으면 안 된다 ‘라는 규칙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식욕만큼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유혹은 쉽지 않습니다. 퇴근할 때 정말 허기집니다. 야간이라도 하고 오는 날에는 스스로에게 치킨이나 족발 등 수많은 음식들을 상으로 주고 싶습니다. 이때 내일 아침에 먹는 내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못 먹는 게 아니라 단지 내일 먹을 수 있도록 기다린다고 생각하니 유혹의 강도가 훨씬 약해졌습니다.
즉 기다리는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단지 기다리면 충족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면서 당장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들도 미루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바로 사고 싶은 게 있으면 핫딜, 지식쇼핑으로 주문했습니다. 하지만 내일까지 참아보면 많은 것들이 의외로 식욕과 비슷하게 필요 없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게임 대신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기다리는 힘을 길렀을 뿐인데 삶의 많은 부분에서 다양한 효과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 충동적으로 하고 싶을 때, 지금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음 날 아침 식욕처럼 너무나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미루는 것, 기다리는 것.
정말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것이 제일이라 생각했던 제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가르침입니다.
이후에 식욕을 지연시키면서 다양한 욕구를 미뤄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식욕 다음으로 가장 큰 욕구를 뽑자면 당연코 ’ 스마트폰 보기‘ 욕구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중에 따로 다루겠지만 이곳에서 스마트폰은 일반 직장인들에 비해 훨씬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여기 와서 놀랜 점은 수많은 경고문구가 장비와 관련된 위험문구인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스마트폰 관련 경고문구였습니다. 워낙 스마트폰 때문에 추락이나 깔리는 사고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랍니다. 휴식시간에 보면 대부분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휴식 대신 스마트폰을 합니다. 누군가는 스마트폰 하면서 쉬는 게 휴식 아닌가 말할 수도 있지만 전문가들도 결국 스마트폰 활동하는 것 자체가 뇌 도파민을 소모하며 정식적인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어떠한 휴식도 취할 수 없다고 합니다. 결국 또 다른 노동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노동현장에서 스마트폰만큼이나 가볍고 단순하고 놀라운 즐길거리는 없지만 제 나름대로 독서나 수첩에 생각들을 적으며 욕구를 지연시켰습니다.
(잠시 제 책 광고를 하자면 이미 몇 년 전에 스스로 스마트폰 사용을 중지해 보면서 연재한 글을 모은 ’ 디지털, 잠시 멈춤‘책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공감 덕분에 세종 도서상도 수상 받았습니다^^)
이러한 욕구들을 지연하다 보면 자연스레 삶의 여유가 조금씩 생깁니다. 마치 돈을 덜 쓰고 저축을 하다 보니 조금씩 더 큰 것을 소비할 여유가 생긴다고 할까나요. 이전에는 심심할 틈도 없이 정신없이 욕구들에 휘둘렸다면 지금은 잠시 멈추면서 무엇이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조금씩 세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선순위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성공 서적에서 나온 말이고 프랭클린 다이어리 같은 것을 구입해서 매번 계획을 세우지만 번번이 실패했었습니다. 모든 게 다 그 순간엔 중요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욕구에 일일이 반응하다 보니 우선순위를 생각할 에너지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선순위라는 말은 바쁜 직장인이나 다이어리를 항상 달고 사는 비즈니스 관련 직장인들에게만 통용되는 말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제 삶에도 우선순위가 있다는 걸 삶의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여유를 가지려면 결국 욕구대로 행동하지 않는 빈 시간, 빈 공간이 필요합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일 달리는 이유 중 하나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빈 공간, ‘공허함’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제가 눈앞의 욕구들을 모두 미루고 맞이하는 빈 시간, 빈 공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허의 에너지(SF느낌이네요^^;) 덕분에 하루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저는 삶의 우선순위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것들을 미루면 결국 중요한 것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