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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석 Nov 08. 2019

언어습관이 정리 습관을 만든다. - 형태, 색, 위치

정리정돈 안 하는 아이, 나를 위한 팁

정리 정돈은 항상 어렵습니다. 

아이들도 색연필을 제 자리에 꽃아 두게 하는 것이 왜 이리 어려운지, 매직 뚜껑을 열어둔 채로 다른 작업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결국 뒤늦게 발견해 애꿎은 매직만 수십 개는 버려왔습니다. 아이들에게 정리 정돈을 가르치더라도 금방 잊어버릴 때가 더 많습니다. 사용한 물건을 제 자리에 두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요?

어느 날 어김없이 아이들에게 가위를 사용하면 꼭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물어봤습니다.


선생님, 근데 제자리가 어디예요?


창가 쪽에 있는 빨간 박스에 넣어 주세요.


그제야 아이는 물건을 원래 있는 곳으로 가져다 놓았습니다.


순간 ‘제 자리’, ‘원래 자리’라는 단어가 아이들에게 쉬운 단어가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창가 쪽 빨간 박스’에 넣으라는 말과 ‘제 자리’에 넣으라고 말을 했을 때 아이들의 행동도 달랐습니다. 당연하게도 구체적으로 말할 때 아이들은 말을 더 잘 들었습니다. 이후 아이들과 선생님의 기준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자리, 정리정돈이라는 말부터 시작해서 정리하는 이유가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습니다.


먼저 정리정돈을 하는 이유들을 생각해 봤습니다.

1. 필요할 때 편리하게 가져다 쓰기 위해

2. 시각적으로 깔끔하게 보이기 위해

3. 자신에게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


아이의 우선순위, 선생님의 우선순위

선생님의 경우 2>1>3의 경우였습니다. 아이들에게 정리정돈을 하는 이유는 깔끔하고 정돈된 교실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집에서도 어머님들이 아이들에게 미술교육을 쉽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물감이 바닥이나 카펫에 묻기 때문입니다. 즉 깔끔함이 사라지는 것이죠. 아이와 이야기해도 “집에서는 물감놀이는 엄마가 못하게 해요”라고 합니다. 이번엔 제 자신을 생각해 봅니다. 저는 깔끔한 성격은 아닙니다. 방에도 어제 먹던 과자는 그 자리에 있고 사용하던 연필, 노트, 컵도 그대로 있습니다. 집에서는 1>2>3 순위로 정리가 되어 있는 것이죠. 퇴근하고 나만의 공간에서 가장 편안하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형태로 놔둔 것입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리는 일단 시각적인 요소가 큽니다. 깔끔해 보여야 산만하지 않고 정신적인 안정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경우는 3>1>2 순위다.
먼저 제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남자아이와 남자 어른은 똑같다고 하죠. 어린 시절의 저도 매번 혼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단 내게 어떤 장난감이 있는지 죽 꺼내 봅니다. 레고 블록도 좁은 바구니에 있던 걸 거실에 쫙 풀어놓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부품들을 꺼냅니다. 수업 때 아이들도 관찰하면 같은 패턴입니다. 먼저 자기가 필요한 걸 다 가져다 사용합니다. 필요해 보이는 건 다 올려놓습니다. 재료들을 가져오고 도구들도 그 자리에 그대로 둡니다. 필요 없다고 다시 원래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일단 자신의 시야에 있어야 합니다. 어른들의 눈에는 산만하고 지저분해 보입니다. 시각적인 깔끔함은 뒤로 밀려났습니다. 신나게 노는 아이들일수록 이 순서는 명확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확인하고 모든 건 자신의 팔 안에 있어야 합니다. 정리를 해야 할 때, 이미 ‘벌려 놓은’ 것들이 많으니 아이도, 어른도 혼란에 빠집니다.


전문가들은 1>3>2 순위다.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전문적인 교수의 연구실이나 유명 아티스트의 작업실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배경에는 수백 권의 책이 쌓여 있습니다. 유명 아티스트의 배경에는 너저분해 보이는 캔버스, 작품들과 다양한 미술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습니다. 누구도 ‘청소 좀 하지. 정말 정리 안 하고 사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수의 경우 연구에 몰두하기 위해 최적화된 환경이고 아티스트도 자신의 창의성과 영감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한 환경입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정리 정돈된 환경입니다.

왼쪽부터 미셸 푸코, 다치바나 다카시, 홍일선 작가님의 작업실입니다. 무엇이 가장 우선순위인지 명확하죠?^^

사진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자료가 자신의 손안에 들어오는 위치에 있습니다. 어떤 교수님은 자료 하나, 책 한 권의 위치만 바뀌어도 혼란이 온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영감을 주고 글을 쓰기에 최적화된 위치입니다. 이걸 보면 아이들이나 예술가, 전문가는 한 끗 차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규칙은 필요합니다. 혼자 지낸다면 상관없지만 부모님, 형제자매와 함께 지내야 합니다. 앞으로 학교에서, 사회에 가서도 남들과 조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결국 정리 정돈하는 습관을 배워야 합니다.


제자리에 두기 위해서는 언어부터 정리하라.

-구체적인 색, 형태, 말을 사용하라.

아이들에게 제자리라는 말은 쉽지 않습니다. 일단 자신이 어디서부터 가져왔는지 잘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던 일에 집중하다 보면 매직 뚜껑도 그대로 열어 놓으니 말입니다. 이때 필요한 건 선생님, 부모님의 언어 습관입니다. “물건 제자리에 두세요” 대신 “빨간 박스에 다시 넣으세요” 나 “동그란 박스에 넣으세요” 또는 “책상 아래에 두세요” 등이 좋습니다. 제자리라는 단어를 색깔, 형태, 위치로 풀어낸 것입니다. 가위를 어디서 가져왔더라?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생각합니다. ‘아 맞다. 빨간색 박스에서 가져왔었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미지로 생각하는 건 우리 뇌의 자연스러운 능력입니다. 네모난 박스, 동그란 통, 파란색 상자.. 모두 이 글자를 읽으면 머릿속에서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를 것입니다. 아이들도 이런 구체적인 시각화를 통해 더 많이 기억할 수 있고 규칙을 잘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연관성, 스토리로 연결하라.

박스에 장갑을 크기별로 보관합니다. 빨간색이 제일 작고 파란색이 제일 큽니다. 박스에 소, 중, 대를 한문이나 한글로 쓴다면 아이들이 쉽게 정리할까요? 빨간색은 빨간색 박스에, 파란색 장갑은 파란 박스에. 이쪽이 훨씬 연관성이 높습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같은 색 장갑, 박스와 연결해서 정리정돈을 할 수 있습니다.

스토리로 접근하는 건 어떨까요? 글루건은 전원을 켜 놓으면 뜨겁습니다. 오래 쓰다 보면 끈적끈적한 글루건 풀(핫멜트)이 덕지덕지 붙습니다. 만약 책상 위에 그대로 있다면 책상도 더러워지고 맨 손에 닿으면 달라붙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아이는 계속 글루건으로 책상 위에 둡니다. 이럴 때 스토리를 이용합니다.


글루건은 사나운 고양이 같아. 그래서 밖에 있으면 너를 물 수도 있어. 그래서 사용하고 나서는 꼭 박스에 넣어야 해.


이렇게 말하고 고양이 소리를 내면서 글루건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연극을 해봅니다. 아이는 웃으면서 스스로 박스에 넣습니다. 이 쪽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안전규칙, 위험이라는 단어조차 아이에게는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색으로, 크기로, 연관성으로 정리하면 쉽게 기억합니다.


나에게 적용하기

수업하며 아이들을 달래기도 하고 혼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을 터득할 때마다 생각합니다.


오늘 수업의 최대 수혜자는 나 자신이다.


아이들이나 선생님이나 비슷한 약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인도 정리 정돈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제일 부끄러울 때가 부모님이, 선생님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지 못할 때입니다. 그렇기에 제 자신을 꼭 돌아봅니다. 나는 정리정돈을 잘하는 것인가? 내 방에 있을 때 나는 정리정돈을 이렇게 하는가? 생각해보니 부끄러워질 때가 많습니다. 이전에는 뻔뻔하게 살았던 선생님이 막상 아이들에게 정리하라고 하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건 아이와 같은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발견은 곧 변화의 시작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내 의도에 따라 놓여 있습니다. 귀찮아서, 손에 잘 닿아서, 보기 좋아서 등 다양한 의도가 있습니다. 모든 의도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매직 뚜껑이 귀찮아서 열어두었다면 얼마 쓰지 않아 버려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무심코 두었던 글루건 때문에 손을 덴 것처럼 말입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책상과 방을 정리했습니다. 마시던 페트병은 당연히 재활용 통 속에 넣습니다. 널브러져 있던 포스트 잇은 바로 책에 사용할 수 있도록 책에 붙여둡니다. 읽고 있는 책들은 크기별로 쌓아 놓습니다. 이러면 쓰러지지 않고 쉽게 읽는 책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기 좋은 환경이 됩니다. 역시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남는 장사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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