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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석 Dec 06. 2019

컵은 깨져도 수업은 계속된다.

아이들은 실수에서도 배울 것을 찾는다.

뉴스에서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과학자들을  적이 있다. 무한하고 깨끗한 에너지를 소개하는 파트에서 나도 모르게 남자아이들도 저기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자 선생님이기에 남자아이들의 넘치는 에너지를 이해할  있다라고 말하지만 때로는 ‘조금은 얌전해 줬으면하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수많은 남자아이들과 수업을 진행했다. 때론 좀비가 되거나 아이들이 원하는 악역을 맡아 전쟁놀이를 한다.  그런 나를 보면 언젠가 좀비 영화에 나와도 훌륭하게   있을 것이다. 특히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 단단히 마음먹어야 한다. 학교라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기 전의 남자아이들은 에너지가 넘친다는 표현으로 부족하다. 자신의 존재감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그날도 어머니가 아이보다 선생님을  걱정하는, 에너지 넘치는 아이가 왔다. 순수하게 선생님과 놀고 싶고 싸우고 싶어 한다. 수업보다는 선생님과 교실 조명을 끄고 좀비 놀이나 칼싸움을 하고 싶어 한다. 어머니에게 수업  무엇을 만들고 그렸는지 설명하는 것보다 오늘은 어떻게 놀았는지 설명하는 게  훨씬 편한 아이였다. 막상  아이에게 경고를 하려고 해도 순수한 눈동자와 미소를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날은 아이의 에너지가 조금 강했다. 선생님이 만들어 놓은 나무칼을 시험 삼아 휘두르다 책상 위의 컵을 깨뜨린 것이다.

쨍그랑!

웬만한 소리는 무시하고 노는 아이들이 일제히 컵이 떨어진 곳을 응시했다. 다행히 작은 컵이었고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다만 컵을  아이는 나를 보며 ‘아차, 저질러버렸네’라는 표정이었다. 깨진 컵을 관찰했다. 에너지 넘치는 아이가 휘두른 칼에  수명을 달리 한 컵은 장렬히 깨져 있었다. 5~6개로 조각  있었다. 보통 때였으면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와 함께 내가 청소를 했을 것이다. 컵도 비싼 것도 아니었고 다친 사람도 없다. 그저 하나의 해프닝으로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대로 넘기기에는 뭔가 아쉬웠다.

수업을 하면 할수록 깨닫게 되는  아이들은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많이 배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재나 커리큘럼이 전체적인 배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적을 것이다. 그것보다 스스로 찾아낸 새로운 발견, 우연히 마땋뜨리는 상황에서 대처하면서  많이 배우고 성장한다.

컵을 깨뜨렸을  대부분 어른들은 아이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행여나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빗자루를 가지고 와서 조심스럽게 쓸어 담고 다시는 주방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매번 그릇을 깨고 접시를 깨뜨릴  아이들은 부모를 바라본다. 결국 깨진 접시는 어른들의 몫이 된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교육적 관점에서 봤을  아이가 얻어가는  어른의 치워줄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도 때론 설거지를 하다가 컵을 깨기도 한다. 이때 조각을 치우며  끝에 닿는 날카로운 조각은 나로 하여금 ‘ 조심하고 손에 힘 조절하는 법을알게 해 준다. 깨지는 소리와 도자기 조각은 내가   주의하며 살도록 경고를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배우고 이전보다  깨뜨린다.

아이들에게도  상황이 새로운 배움의 기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컵을 깨뜨린 당사자는 안전부절하면서 어쩔  몰라한다. 원래대로라면 가볍게 혼을 내고 조각을 치우고 수업을 진행한다. 깨진 컵은 그저 과거의 해프닝으로 넘겨버리면 되는 것이다. 왠지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놓치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비슷한 기회를 얻으려면  몇 개월, 몇 년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지도 모른다.

, 네가 부셨으니 이제 원상태로 만들어 볼까?”

? 어떻게요?”

네가 항상 사용하는 글루건 있지 않니? 그걸로 원래 모양으로 붙이면 어떨까?”

, 계속 보니까 3D 퍼즐 같다”

깨진  조각들을 보고 3D 퍼즐이라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며 역시 모든 것은 배우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깨닫는다. 누가 아이들은 공부하기 싫어하고 놀기만 한다고 하는가. 어디서나 아이들은 배울 거리를 찾는다. 어머니께는 오늘 아이의 수업은 깨진 컵을 복원하는 거라고 말씀드렸다. ‘기어이 사고를 냈구나라는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가셨다.



작업 자체는 간단하다. 아이의 말대로 3D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다. 조각들을 모아놓고 글루건으로 하나씩 붙여나가면 된다. 5~6조각이기 때문에 퍼즐 난이도로는 유아용인 것이다. 아이의 손에 깨진 접시는 나름대로 가해자(?) 책임지도록 계산해서 깨진 것은 아닐까. 아이는 글루건으로  조각  조각을 붙인다. 글루건이 덕지덕지 붙어간다. 애초에 완벽한 복원은 기대하지 않았다. 아이가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 벌인 일에 책임지는 것이 목표였다.

40분이 지나고   컵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찾지 못한 작은 조각이 그대로 뚫려 있고 곳곳에 글루건이 지저분하게 붙은 컵이 완성되었다. 아이의 얼굴은 안도와 함께 이제는 쉬어도 되겠지 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제  마시러 가자
이걸로 어떻게 물을 마셔요?”
네가 고쳤으니까 한번 써봐야지.”

어이없어하는 아이와 함께 세면대에서 물을 받아본다. 당연히 이곳저곳에서 물이 줄줄 흘러나온다.


우와 샤워기다”라고 하며 아이는 손을 씻기 시작했다.  어느 때라도 즐거워할  있는 힘에 오히려 내가 웃고 말았다. 아이는 즐거워하며 계속해서 깨진 컵에서 나오는 물로 손을 씻었다. 그렇게 컵은 아이의 손에 깨지고 지저분해진 손을 씻기고 있었다.

잠시  어머니께서 급하게 사온 듯한 스타벅스 머그컵 세트를 건네주었다. 어머니는 거듭 죄송하다고 말해서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아이는 오늘 자신의 잘못을 자신의 힘으로 나름대로 용서를 받았다. 비록 이전에는 커피를 담을  있는 컵이었다면 지금은 샤워기로 변했지만 말이다. 결국 아이와 선생님은 서로 컵을 교환했다.


지금도  책상에는 스타벅스 컵이 놓여 있다.  컵을  때마다 아이의 에너지가 어떻게 컵을 변하게 했는지 생각한다. 모든 상황에서 배울  있는 힘을 갖는  쉽지 않다. 성인들도 실수하면 도망치기 바쁘다. 나도 실수한 것은 모른 척하고 덮어두고 조용히 살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깨진 컵을 아이에게 다시 붙이게 했으니 나도 이제는 조용하게  수는 없을  같다. 깨진 조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만드는 , 잘못한 일에서 새로운  발견하는 것을 배웠다.   수업은 어쩌면 아이가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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