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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용석 Dec 04. 2019

아이들의 ‘이거 누가 만들었어요?’의 진짜 의미는?

아이들이 원하는 건 이야기다.


선생님, 이거 누가 만들었어요?


아이들은 교실의 작품을 보고 항상 같은 질문을 한다. 누가 만들었는지 누구 건지 집요하게 물어본다. 설령 “아 그건 000이라는 아이가 만든 거야”라고 말해봤자 어차피 모르는 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항상 “이건 누가 만든 거예요?”라고 물어본다. 그렇다고 모든 작품을 보고 물어보지 않는다. 누가 봐도 잘 만든 작품이나 뭔가 특이해 보이는 것들만 물어본다.

잠시 나를 돌아본다. 한 때 인터넷에서 ‘보면 죽는 그림 시리즈’가 유행했다. 들어가 보면 의자 위에 여자 얼굴만 덩그러니 있다던지 말라비틀어진 두 연인이 미라가 된 채로 껴안고 있는 그림들이 있었다. 소름 돋는 그림들만 모아놓고 사람들을 놀라게 할 의도로 만든 게시물이다. 사실 대학생 때 미술을 공부하면서 이 그림들은 낯이 익었다. 초현실주의 화가인 즈지스와프 백신스키의 그림들이었다. 처음 그림을 봤을 때 소름 끼치는 것도 있지만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거 누가 그렸을까?’라고 생각했다.

‘아 그렇지. 어른들도 뭔가 눈길을 끄는 것을 보면 그걸 만든 사람이 궁금해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다시 아이들을 바라본다. 또 어떤 아이가 벽에 붙어 있는 캐릭터 모음집을 보고 누가 만들었냐고 물어본다. 내가 이 교실에 오기 전 이전 선생님이 원형의 폼보드 조각에 나름 감각적으로 히어로 캐릭터들을 그렸다. 마음 같아서는 시큰둥하게 “예전 선생님이 만든 거야”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캐릭터에 푹 빠져 있던 선생님이 밤을 새워서 그린 거야


라고 말했다. 그 선생님이 남는 시간에 만든 거지만 왠지 좀 더 흥미롭게 말하고 싶었다. 그 선생님은 히어로 캐릭터를 워낙에 좋아해서 여기저기에 그림들을 그려놨다고 했다. 아이스크림 막대기에도 그리고 휴지심에도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아이들은 더 꼬치꼬치 물어본다. 별거 아닌 이야기지만 이전 선생님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나도 대학생 때 ‘상실의 시대’를 보고 무라카미 하루키에 푹 빠졌다. 자연스럽게 그가 쓴 소설을 비롯해 에세이, 인터뷰 등을 찾아 읽었다. 그럴수록 그 사람의 인생이, 삶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소설가가 아니라 재즈카페를 운영했던 이야기, 우연히 맥주를 마시며 야구 경기를 보다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까지 완전히 빠져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궁금했던 건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이야기였다. 그의 인생이 어땠길래 이런 소재로 책을 쓸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알고 싶은 건 이름 석자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이야기다. 이거 누가 만들었어요? 의 진짜 의미는  작품에 숨겨진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였다. 스페인에 아이들을 데리고 피카소 미술관에 갔다. 처음에는 전시관의 무거운 분위기, 다들 쉬쉬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러다 아이들이 집중하는 때가 있다. 바로 그림에 대한,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다.


이 그림을 그릴 때는 피카소의 나이는 불과 13살에 불과했어.
스승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는 그를 가르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데.
평생 그림을 그려온 선생님이 있는데 너희가 그림을 훨씬 잘 그리면 기분이 어떨까?


이 그림은 스승님을 기리기 위해 특별히 스승님을 그림에 넣었데. 어디 있는지 찾아볼까?


이런 이야기들이 오히려 아이들을 그림에 더 집중하게 했다. 어차피 피카소가 그린 그림들은 모두 명작의 반열에 올라온 그림들이다. 전공자가 아닌 이상 색감이나 붓터치에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다. 반대로 그림에 숨겨진 이야기를 들으면 이상하게 더 많은 관심이 간다. 즉 이야기가 우리를 끌어들인다.

저건 누가 만든 거예요?

갑자기 한 아이가 물어본다. 내가 예전에 만들었던 구슬 트랙을 가리킨다. 보통 때였으면 “응 선생님이 만든 거예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원하는 건 작품의 이야기다.

선생님이 만든 건데 겨울왕국을 보고 감명받아서 엘사의 궁전 느낌으로 만들어 봤어.라고 말하자 아이들은 갑자기 우르르 내 구슬 트랙을 관찰한다. 이미 6년이나 지나 엘사 궁전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다. 계속해서 고치고 뜯어진 곳은 덧붙여서 몰락한 귀족의 궁전이라 하면 될까.  한 아이가 울라프(였던) 조각을 찾아낸다. 다른 아이도 엘사(였던) 무언가를 찾아낸다. 결국 그 날 아이들은 구슬 트랙을 만들었다. 감명받은 작품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한 아이는 칙칙해진 내 구슬 트랙에 하늘색 물감을 발라준다.(제발 허락 맡으라고 말하고 싶었다) 얼음궁전의 느낌을 다시 살리고 싶었나 보다. 이때만큼은 복원가 못지않은 눈빛이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이야기를 원한다. 그 사람이 재미있는 이유는 독특한 그 사람만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수백만명의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버들은 매번 재미있는 이야기,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 곧 그 사람이 된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쌓여서 하나의 브랜드를 만들고 하나의 캐릭터를 만든다.

누가 만들었는지 물어보는 아이들의 질문에 단편적인 대답을 하면 안 된다.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질문이 의미 없이 사라질 수도 있고 계속해서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사진 설명 : 6년 전 처음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엘사의 얼음궁전 구슬 트랙.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하며 아이들이 굉장히 좋아한다. 다만 세월의 흐름에 견디기 위해 거듭된 업데이트(?)로 인해 엘사 궁전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남자아이들의 거친 손길을 견디기 위해서는 모든 곳을 튼튼한 나무로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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