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용석 Jul 10. 2020

(?)양자역학이 나를 위로한다.

세상에는 확실한 건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패드에 관한 글을 쓰다가 문득 이 글을 먼저 써보고 싶었습니다.

아직 넘버링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좋은 위치에 넣도록 하겠습니다.




굉장한 우울함이었다.

어느 날 침대에서 눈을 뜨기도 전에 나는 침대 안에서 단 한순간도 꼼짝할 수 없었다. 마치 침대가 관짝이 된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고 가늘게 뜬 눈으로 들어오는 천장은 관 뚜껑 같았다.


갑자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답답했다.


언제까지 이 똑같은 천장을 봐야 하지?


이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너무나 똑같은 날들에 지쳐있던 것일까.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 때문이었을까. 아마 모두 해당되었을 것이다. 온갖 질문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녀석들은 마치 나를 생생한 살코기 마냥 달려들어 뜯어먹는 것 같았다.


왜 지금 너는 이것밖에 되지 않아?
다른 친구들은 이렇게 사는데 너는 왜 이거밖에 안돼?


끝없는 물음이 나를 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날들이 자주 있었다. 그나마 일 년에 두세 번은 반드시 해외로 나갔다. 낯선 천장을 보면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기회를 꿈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풍선에서 바람을 조금씩 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가까스로 위기를 넘기곤 했다.


코로나가 터졌다.

2020년 벌써 7월이다. 일 년의 절반이 그대로 뭉텅 누군가에게 뜯어 먹힌 것 같다. 1월의 제주도 여행이 정말로 꿈만 같다. 코로나 터지기 한 달 전쯤, 친구가 대만을 가자고 했다. 제주도 여행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나중에 가자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다. 올해, 아니 한동안 몇 년 동안의 마지막 해외여행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나 스스로 복을 걷어차 버린 것 같았다.


결국 지금껏 반복되는 일상을 버티며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 점점 내 안에 풍선이 다시 부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다시금 내 안의 물음들이 나를 물어뜯을 준비를 하고 있다.


#부러우면_진_것

때론 인스타 친구들의 피드(feed)를 보지 않는다. 그저 내 그림만 올리고 꺼버린다. 솔직히 말하면 다른 친구들의 행복함이 보기 싫어서다. 최고로 행복한 순간만이 올라오는 인스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볼 때마다 내 행복은 보잘것없이 느껴진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새로운 피드가 올라오기 전에 바로 종료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내 마음이 편안하고 여유가 생길 때 조심스레 실행시켜 좋아요를 누른다. 굉장히 지질하다.


그리고 양자역학을 만나다.

절대로 ‘관찰자 효과’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기 계발서에 양자역학이 나오면 바로 책을 덮는다. 최근에도 주변의 추천으로 자기 계발서를 읽었다. 책 속 주인공은 성공한 사업가가 알려준 주문을 외웠더니 갑자기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단다. 또 어떤 사람은 사업 자금이 부족해 부도가 나기 직전에 주문을 외우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원하니 전화 한 통이 왔다. 바로 수백만 달러가 입금됐다고 한다. 뭔가 싸한 느낌이 나지만 그래도 읽었다. 갑자기 뒷부분에 과학이야기가 나온다. 설마 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양자역학의 관찰자 효과를 말한다. 그 순간 책을 덮었다. 바로 다른 사람에게 처분(?)했다.


관찰자의 존재 유무에 따라 입자의 상태가 변한다는 관찰자 효과. 이중 슬릿 실험은 사실이지만 관찰자의 의지가 결과를 바꾼 다는 내용은 사실무근이다. 관찰자 효과 용어 자체가 양자역학에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너도 나도 이 단어를 쓰면서 사람의 의지로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내가 강렬히 원하면 온 우주가 나를 도와준다고 한다. 그렇게 갈망이, 열망이 현실을 변화시킨다면 나를 도와주면 안 된다. 전쟁터에서 가족사진을 보며 살아남기를 원하는 소년병이나, 어딘가에서 깨끗한 물 한 모금, 먹을 것 한입을 원하며 죽어가는 누군가를 위해서 우주가 나서야 할 것이다.


결국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 의지로 나조차 변하기 힘든데 누구를 변화시킬까.



그래도 양자역학은 나를 위로한다.

그렇다고 내가 양자역학을 완전히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현재 과학자들조차도 ‘잘 모르겠다’라고 하는 마당에 책 몇 권 읽었다고 양자역학을 함부로 떠벌리고 싶진 않다. 자칫하다간 결국 우주가 나를 도와야 하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다. 대신 명백히 실험으로 밝혀진 것과 과학자들의 공통된 결론을 말하고 싶다.


이 세계는 확률로서 존재한다.


입자들의 위치는 모든 순간 기술되지 않고 특정 순간의 위치만 기록된다. 입자들은 다른 무언가와 상호작용 하는 순간만 존재한다. -하이젠 베르크-


우리는 파도처럼 그리고 모든 대상들처럼 사건들의 흐름입니다. 우리는 과정입니다. 잠깐 동안만 한결같은...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중에서-


지금 나는 책상 위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의자의 쿠션이 느껴지고 키보드를 하나하나 누르고 있다. 모든 것이 실재한다. 하지만 내 손가락과 키보드 사이를 무한히 확대하면 서로 밀어내는 전자들이 있을 뿐 손가락은 키보드에 닿은 적이 없다. 더 확대하면 무수한 원자들이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가능한’ 모든 공간에 위치한다. 심지어 이 세계에서는 시간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상호작용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사라질 가능성은 당연히 제로(0)다. 하지만 양자역학의 관점에서는 완전한 제로가 아니다. 아주 약간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모든 것은 타이밍이다.

어릴 적부터 타이밍이라는 단어를 싫어했다. 왠지 축구나 피구에서 내가 공을 잡거나 패스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굼뜨고 느려서 누군가와 경쟁을 하면서까지 운동하는 걸 싫어했다. 타이밍은 나와 관계가 없다. 하지만 사회에 나와보니 많은 것이, 아니 대부분이 타이밍이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많은 결정이 우연히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던 사람과의 만남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이 인연이든, 악연이든 간에 모든 것은 타이밍, 다른 말로는 확률이다. 양자역학을 공부하면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도 확률에 기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 좋은 만남은 내 의지로만 가능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인생 자체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노력 대신 그저 운이 좋을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일까? 그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모의주식 투자에서 상위권을 차지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매수도, 매도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때에 말 한마디 잘못해서 공들여 쌓은 관계가 무너지기도 한다.


수업할 때 아이들이 글루건을 사용할 때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이제 건들지 말고 기다려”이다. 굳어가는 글루건을 빨리 안 굳는다고 이리저리 움직이면 결국 지저분해지고 붙지도 않는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임을 알지 못한다.


결국 이런 의문이 든다.

‘내가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계획을 세우는 이유는 성공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말장난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확률적인 시각이 내 마음가짐을 바꿔 놓았다. 이전에는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나를 지배했다. 흑과 백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우리가 가장 인지하기 쉬운 심리적 형태다. 어릴 때부터 만화에서 착한 놈과 나쁜 놈이 확실해야 보기가 편했다. 학교에서도 시험성적으로 학생을 구분했다. 합/불 시험은 더 명확하다. 그래서 세상은 명확하게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회는 달랐다. 흔히 말하는 ‘금수저/흙수저’로 인한 시작의 차이, 여러 인연들이 얽혀 만든 기회의 차이들이 있다. 하지만 학교뿐만 아니라 드라마, 자기 계발 서적에서는 여전히 내 노력만으로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계획을 통해 성공하는 것(X) -> 계획으로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것(O)


사실 계획대로 된다는 말은 굉장히 단순한 사고방식이다. 내 뜻대로,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면 정말 좋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내 계획에는 ‘변수’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매번 목표를 세워도 실패하는 이유 중 대부분은 ‘예기치 못한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했을 때 어느 날은 회식이 있고 또 어떤 날은 소위 ‘입 터진 날’이 있다. 아니면 믿고 있던 다이어트 비법이 알고 보니 효과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대로 포기해 버린다. 나는 신이 아니다. 애초에 모든 변수를 넣어서 계획할 수도 없고 변수 없는 계획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렇기에 성공하기 위해 계획하고 준비한다는 것은 부담이 크다. 준비하고 계획한 것이 많을수록 결과에 대한 기대와 부담이 커진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만큼 절망한다. 하지만 내 계획과 준비가 단지 성공의 확률을 높일 뿐이라고 생각해보자. 여전히 실패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이쪽이 훨씬 현실적이고 회복 탄력성도 강해진다.


좋아하는 이성의 마음을 얻고자 할 때도 확률적 시각이 필요하다.

흔히 이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큰 시도를 할 때가 많다. 큰돈을 들여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가입하거나 수십만 원어치의 옷을 사기도 한다. 아니면 이성에게 식사나 물질적인 선물을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상대방이 부담을 느껴 멀어지고 만다. 특히 연애가 서투른 사람일수록 ‘완벽한 자신’의 모습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매일 그림을 그려 그림실력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큰돈으로 미술학원에 등록하고 비싼 도구를 사야 한다는 논리와 같다. 반면 연애를 잘하는 사람은 가볍게 접근하고 사소한 것을 챙겨줌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다. 이것도 확률적인 시각으로 보면 사소한 것 하나가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확률을 높여주는 것이다. 한 가지 커다란 선물이나 접근보다 작고 사소한 말 한마디가 쌓여 호감이 생기는 것이다. 즉 상대방의 마음을 얻으려면 매번 인사하는 말 한마디, 사소한 것 하나가 확률을 높여주는 것이다.


이성의 마음을 얻는 것(X) -> 마음을 얻을 확률을 높이는 것(ㅇ)


이렇게 생각하면 누군가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지 않는다. ‘그저 확률을 높이는 것뿐’이라는 생각 덕분에 서로가 부담이 없다. 행여나 상대방이 거절한다 해도 절망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또 다른 확률을


나의 마음도, 의지도 확률로 존재한다.

마음의 움직임을 양자역학 단위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옥스퍼드 수학자 로저 펜로스는 ‘황제의 새 마음’이란 책에서 “매 순간 변하는 의식의 본질은 양자적 과정에 의해 일어난다”라고 말한다. 뇌 안에서 양자 파동 함수를 측정할 때마다 ‘무작위 상태’로 붕괴하는 과정이 생기는데, 이것이 의식의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 마음의 변화무쌍함은 양자역학의 레벨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일하기 싫은 상태도 확률이다.

만약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컴퓨터가 미리 ‘내가 실수할 것’을 100% 예측할 수 있다면 어떨까? 다소 끔찍한 이야기지만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한 실험에서는 골프선수가 퍼팅을 할 때 뇌 움직임을 관찰했다. 여러 번 퍼팅을 하면서 잘 될 때와 실수할 때를 구분했다. 데이터를 분석 후에 컴퓨터는 선수가 퍼팅을 하기 2~3초 전에 결과를 예측했다. 놀랍게도 예측에 성공했다. 이 연구를 토대로 우리의 행동도 타이밍, 즉 때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내면의 상태에 따라 집중하기 좋을 때가 있고 산만할 때가 있다. 친구들과 게임을 할 때 잘 안되면 “오늘은 날이 아닌 거 같다”라는 말이 변명이 아닐 수도 있다.


결국 내가 일을 잘 못하고 실수가 잦으면 ‘나는 왜 이모양이지?’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저 오늘은 뇌의 상태가 지금 하는 일과 잘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다. 꾸준히 글을 쓰고 싶어도 뇌가 따라주지 않으면 다른 일을 하는 게 좋다. 안 되는 일을 가지고 절망하고 자책하면서 붙잡고 있는 것은 뇌와 나 모두에게 좋지 않다.


매일의 작은 노력으로 확률을 높여나가자.

괜히 거창하게 양자역학을 들먹였다고 생각할 것 같다. 아니면 확률적인 시각이 누군가에게 어설픈 변명으로 보일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확실한 위로를 얻었다. 지금 내 세계는 너무나 확실히 존재하고 불변일 것 같지만 결국은 변한다. 계절은 바뀌고 지금의 코로나도 분명 극복할 것이다. 만약 지금의 상태가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다면 절망적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 자체가 모든 것은 영원하거나 확실한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저 멀리 뭉게구름을 보면 하늘과 구름의 경계가 또렷하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구름 속으로 들어가면 구름과 하늘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애초에 구름이 존재하기라도 했는지 의심이 든다. 양자역학은 세상의 모든 것은 이렇다고 가르친다. 절대로 100% 확률로 존재하는 존재나 사건은 없다. 가까이 보면 모호하고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덕분에 내 상태도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노력이 보잘것없어 보여도 내 삶을 멋지게 만들 확률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자역학은 나를 위로한다.






작가의 이전글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향기가 맡고 싶은 분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