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예고 없이, 내 눈앞에 놓인 기획안.
멍하니 두 눈을 깜빡깜빡.
'퇴근하고 바로 와서 내가 너무 피곤한 건가 하는' 생각과 약간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상태.
우리의 시작은 정말 갑자기 찾아왔다.
그러니까 그날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나간 저녁자리였고,
얼떨떨한 제안에 집에 오는 내내 제대로 실감이 나지도 않았다.
취향이 닮은 우리의 도전
언니는 나랑 같은 곳에서 증명사진을 찍은, 그러니까 그만큼 취향이 닮은 사람이다. 처음에 연락처를 저장하자마자 뜬 프로필 사진을 보면서 그냥 느낌이 좋았다. '우리, 잘 통하겠다' 싶어서.
동시에 언니는 한 조직의 '팀장'이기도 하다. 막내만 3년째 하고 있는 나에겐 그 무게가 어떨지 짐작도 가지 않는. '어리고', '여자'라는 어떻게 보면 이 사회의 시선으로 봤을 때는 핸디캡 아닌 핸디캡을 가지고도 언니는 첫인상부터 행동 하나하나까지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런 언니가 내 눈앞에 내민 기획안은 정말로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놀람 그 자체였다. 나에게 맞춰, 내 무엇을 살려야 좋을지 고민하며 적어 내려간 종이에서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 나에 대해 얼마나 알려고 노력했는지. 그리고 동시에 눈앞에 그려졌다. 언니가 나를 통해서 꿈꾸는 내일이. 내가 식사 자리에서 제안을 수락한 가장 첫 번째 이유는 그거였다. 나에 대해 이만큼 알려고 노력하고, 나를 통해서 내일을 꿈꾸는 당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 역시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뭐 나머지는 부가적인 이유였다. 취향이 통하는 우리 둘이 한다면 결과에 상관없이 재밌는 도전이지 않을까. 동시에 이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면 믿고 한번 직진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시작한 토요일 오후의 글쓰기 디깅은 사실 내 스케줄에서는 무리이기는 했다. 데일리로 뉴스를 하면서 주말에는 위클리 음악 프로그램을 들어가는 내게 이미 주말은 없었으니. 내 체력이 버텨줄까 하는 두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도전 앞에서 느껴지는 설렘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과감히 또 한 번의 도전을 택하는 나 스스로를 보면서 '넌 정말 일 욕심 좀 줄여야 해' 생각했지만ㅎㅎ. 결과는 아직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수준도 아니다. 처음인데 뭐, 이 정도면 됐지 하는 셀프칭찬을 해줄 수 있는 정도?
두 달간 하나의 프로그램을 이끌면서 기자 일과 직장인으로서의 일상을 통해서 배우는 것들과는 조금 다른 것들을 배웠다.
일단, 강의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생각보다 내가 카메라 없이 하는 일에도 재미를 느낀다는 것
콘텐츠 생산자인 나는 예상외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도 보람을 느낀다는 것
나에 대해 이만큼 알고
새로운 세상에 대해 이만큼 배웠으니
이걸로 충분하다.
인터뷰어에서 인터뷰이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일상인 내가, 화면 속 나를 모니터 하는 게 일인 내가. 그저 사람을 마주한 또 하루가 있었다. 진작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어느 봄날이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여름이 성큼 찾아온 지금까지 미루고 미뤄온.
그날은 대안학교 '민들레 공간' 학생들과 함께한 인터뷰 시간이었는데. 정말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항상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어'였던 내가 질문을 받는 '인터뷰이'가 되었으니.
누군가는 나의 브런치 구독자, 누군가는 나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누군가는 나의 라디오 청취자.
인터뷰에 앞서 짧게 나눈 대화에서 "저는 기자님의 브런치 구독자예요", "저는 인스타그램 팔로워예요"라는 학생들의 말들이 그렇게 감동일 수 없었다.
누군가 내게 관심을 가져주고 나를 궁금해한다는 것.
그건 참 과분한 선물이다
한 시간 정도 인터뷰를 하는 내내 신기하게도 답변을 하는 내가 오히려 에너지를 얻었다. '다시 태어나도 기자를 할 건지', '기자가 된 걸 후회하지는 않는지'와 같은 살짝 어려운 질문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감사했다. 누군가 당신에게 '후회하지 않냐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흔한 경험은 아니니까.
바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나름 고민 끝에 신중히 답하며, 동시에 모든 답변에 최대한 솔직하게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오랜만에 숨 쉬는 느낌이었다. 카메라를 보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눈을 보고 마주한다는 게 이렇게 소중한 시간인지 그제야 알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바랐다. 친구들끼리 모여 라디오 프로그램 한 번 만들어보겠다는 이 친구들의 목표가 꼭 결실을 맺기를. 어떤 콘텐츠든 준비하다 보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걸 깨닫기 마련이다. 방송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협업이 생명이니까. 팀원들끼리 의견이 부딪히는 순간이 반드시 한 번쯤은 올 것이라는 것도 짐작이 갔다. 그때마다 이 친구들이 "나 안 해!"라고 포기하기보다는 대화하고 양보하고 타협하면서 공간민들레만의 색깔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가기를, 부족한 방송 선배로서 응원했다.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아이들이 내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면서 키워가는 이 호기심과 열정이 식지 않기를 바랐다. 훗날 나처럼 카메라와 마이크 앞에 서는 게 일이 되는 친구도 있을 거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그 어떤 것이든 그냥 마음껏 꿈꾸고 도전해보길 응원했다. 아직 학생이니까. 나 역시 학생일 때는 정말 마음껏 꿈꿨으니까. 26년째 살아보니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속 편하게 꿈꿀 수 있는 시간은 학생일 때뿐이다.
언니도 아이들에게도 참 고마운 건 지쳐있던 내 세포를 다시 깨워줬다는 거다.
나를 보면서 내일을 꿈꾸는 당신들이 있어 나는 한번 더 도전해보고 싶어 졌으니까.
회사는 자아실현의 공간이 아니라고, 그러니 회사 밖에서 네가 꿈꿀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라는 선배의 조언이 그제야 와닿았다. 꼭 카메라와 마이크가 함께이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가르쳐줬고, 내가 가진 재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려줬다. 내 능력을 귀하게 여겨 줄 사람과 조직이 있다는 것도, 나를 보며 내일을 꿈꾸는 이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이제야 배웠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보며 내일을 꿈꾸니까 가끔 다 포기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와도 나는 섣불리 감정적으로 무언가를 내던지거나 포기할 수가 없게 됐다.
당신의 꿈도, 아니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꿈이 계속되길 정말로 기도하니까.
그러니, 감사해요.
길게 썼지만,
저를 보며 내일을 꿈꾸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이 얘기를 꼭 전하고 싶었어요.
2021년 6월. 여름의 문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