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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May 11. 2022

방송하며 사는 인생이란

22.5.1 클로징

매주 한 시간을 채우는 뮤직트리 덕에 제 플레이리스트는 정말 다양한 음악들로 채워졌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채워야 했던 오프닝 덕에 제 스물넷부터 스물일곱까지 모든 시간이 원고에 선물처럼 남겨져있습니다.

제가 이만큼 많이 얻어가는 만큼
여러분께도 저와 함께하는 시간이 응원이었고 희망이었고 선물이었길 기대합니다.

오늘 끝곡 자우림 – 스물다섯, 스물하나 들려드립니다.

함께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지금까지 서효선이었습니다.


8년. 스무 살 때부터 지금까지 마이크 앞에 서온 시간.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하고 싶어 하는 방송이 일이고 취미고 놀이였던 그런 시간. 나의 일이 곧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기회라는 걸 알기에 빠듯한 스케줄 속에서도 쉽게 불평할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처음은 라디오 뉴스로 시작해서 참 많은 프로그램들을 거쳤다. 클래식 라디오 프로그램, 에너지 가득한 아침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까지. 뉴스도 원 없이 했다. 일이 많을 땐 하루에 아침, 점심, 저녁 뉴스를 다 들어가서 모니터도 다 못했던 시기도 있었다.


신기한 게 똑같은 프로그램은 하나도 없어서 현장을 주야장천 나갈 때는 스튜디오가 그립다가도 스튜디오에 있으면 덥고 추운 날  그대로의 현장이 그립고, 뉴스를 할 때는 말랑말랑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좋다가도 막상 뉴스를 안 들어가면 그 긴박함이 끌린다.


다시 볼 일 없을 걸 알면서도 항상 쉽게 버리지 못하는 원고


개성만큼 흔적도 제각각


이렇게 개성 강한 나의 일들은 남기는 흔적도 제각각이다. 뉴스는 내 온몸에 있는 세포를 깨워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반응하게 한다.(예민해 질 정도라는 게 단점이지만?)  뉴스 이외의 프로그램들은 날씨, 연애, 건강 등 세상 사는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웬만한 사람이랑 마주 앉아도 적당한 대화 주제를 찾아내는 비교적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10대를 타깃으로 한 시간대에 들어가면 아이돌 공부를 반강제로 해야 하는 덕에 또래보다 훨씬 젊어질 수도 있다.('나 나이 드나 봐'하는 현실 자각과 함께^^)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나'를 남긴다. 

뉴스를 매일 하면 일기를 쓰지 않아도 내 이름을 검색하면 내가 어디에 갔는지 보이고, 하루하루 내 표정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하다못해 지난달에 마스크는 어떤 걸 썼는지까지  수 있다. 음악 라디오 프로그램 선곡표를 쭉 보면 그때 음원차트 1위는 어떤 노래였는지, 나는 어떤 노래를 가장 좋아했는지도 보인다. 감사하게도 오프닝이랑 클로징에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정말로 인생을 남기는 거다.


2019년에 들어간 프로그램이 그랬다. 학부 때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게 계기가 되어서 우연히 시작한 방송이었는데 스물네 살엔 정말 열정이 넘쳤던 때라서 주말 프로그램인데도 과감히 도전했다. 이것저것 아이디어도 많이 내보고 시행착오도 겪으면서 바닥부터 만들어갔는데 어느 날 문득 회의에서 오프닝을 디제이 일기로 가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그래서 오프닝 마지막 멘트는 항상 '스물넷 00일째', '스물다섯 000일째' 이런 식이었는데 설렘 반 부담반으로 시작한 도전이 2022년에 '스물일곱 00일째'까지 이어질지 그때의 우리는 몰랐다.


한번 한번 방송할 때마다 프로그램이 나랑 같이 나이 들어가는 기분. 이런 프로그램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일요일 저녁 프로그램이라 평일 스케줄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준비에 들어가야해서 몇 년 동안 주말이 없었음에도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애정이 각별했다. 그만두기도 쉽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안 될까' 스스로에게 부탁하면서 3년을 끌고 왔다.


그러다 이제 정말 휴식 없이는 안된다는 걸 깨달은 스물일곱의 봄. 어찌 보면 그동안의 애정에 비해선 꽤나 과감하게 그만둠을 선택했다. 위클리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이 프로그램이 있는 한 고작 며칠 붙여서 쉬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청취자들은 1주일에 한번 만나는 진행자가 그 하루만 투자하면 된다고 느끼지만 방송은 절대.. 그럴 수 없다. (가끔 견학이나 인터뷰를 하며 현장을 오시는 분들이 가장 놀라시는 게 몇 초를 위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장시간 준비하고 촬영한다는 거다.)



마지막 방송의 클로징 멘트를 고민하면서 지난 3년간 무엇을 얻었나 돌아봤다. 감사하게도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귀한 곡들, 청취자들이 보내준 사연과 응원들, 음악과 이야기를 나누며 받은 위안들이 있다. 따라주지 않는 체력에 내 스스로에게 부탁하는 마음으로 마이크 앞에 섰던 간절함도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3년의 시간이 빼곡히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방송하며 사는 인생은 뭐가 좋은지 묻는다면 단연 첫 번째로 이렇게 답하고 싶다.


인생을 기록할 수 있는 직업이에요.


생을 다하기 전에 에세이 하나 내는 게 목표인데,

덕분에 20대 중반은 글감을 따로 찾지 않아도 되겠다.

고마웠어, 뮤직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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