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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마니 Nov 05. 2024

버뮤다 팬츠와 반바지

임상 및 상담가로서 '나'의 강점을 말할 때 늘 언급했던 점이 있다. 거만한 태도까지 곁들이지는 않지만 이제껏 주변의 피드백들로 이뤄져 데이터에 기반한 사실이라는 듯이 자신감은 한 스푼 얹은 어조는 잊지 않았다. 그 강점은 '유연함', '편견이나 선입견의 색채가 강하지 않다'는 것인데, 심리학을 전공한 사람이 인지적으로 유연할수록 그리고 자기만의 편견이나 선입견이 강하지 않을수록 상담을 진행할 때 내담자에겐 물론 상담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상담자와 내담자 간 안정적이고 신뢰로운 관계를 원활하게 구축할 때도, 상담자의 자기 돌봄, 자기 분석 을 할 때에도 장벽이 두껍지 않아 시간과 에너지, 돈까지도 아낄 수가 있다. 지난 연재 '난임 상담사의 난임 일기' 글에서도 아니나 다를까 쓴 적이 있었는데 이제 글을 수정하고, 다른 강점을 발굴해봐야 하나 싶다.


어느 날엔가 다음 일정으로 마음이 바빠 시간에 쫓기던 때였다. 그 와중에 나는 책 욕심은 물론 커피 향도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 잠시 러너가 되면 책도 찾고, 바로 뒤편 골목을 지나면 있다는 '커피 맛집'도 들를 수 있을 것 같다는 계산이 섰다. 도서관의 주차자리는 단 30분의 회차 시간을 허용하거니와 곧바로 다가오는 약속에도 늦지 않게끔 나는 운동화끈을 고쳐맨 후 예약도서를 관리해 주는 사서님께 돌진했다. 빠르게 책을 빌리고, 읽은 책은 반납한 후 카카오맵 어플을 켜서 '커피 맛집'을 찾아 나섰다. 도서관에서 도보로 200m 남짓한 곳이긴 하지만 실수 없이 움직이려 지도 어플을 참고했다. 사실 카카오맵 어플은 '리뷰 맛집'이기도 해서 블로그나 인스타처럼 광고로 도배되지 않은 '찐 리뷰어'들이 많다는 소문을 믿어보자는 마음으로 처음 카페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나는 미각이나 후각이 둔감한 편이지만 취향은 강해서 계속적으로 사 먹고 싶은 카페는 두 군데 정도가 전부였다. 그렇지만 올해 초 이사를 한 후 동네 단골집을 가기가 어려워지면서 단골 커피 맛집을 새로 뚫고 싶은 욕구가 강한 상태였다.


카카오맵 어플의 리뷰어들은 이렇게 평가했다.

'핸드드립커피가 아주 맛있는 동네 커피집', '숨겨진 커피 맛집!', '인생커피집',..

설렘과 기대감으로 낯선 골목길에 들어섰고, 멀지 않은 곳에 낯익은 상호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한 번 놀라고, 카페로 내디뎠을 때는 흠칫 한 번 더 놀랐다. '아.. 이게 아닌데..'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을 조금 더 정확한 단어로 표현을 해보고 싶다. '놀랐다'는 것은 '대단한 광경이나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흥분한 상태'를 반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 '뜻밖에'라는 단어가 맞아떨어지게 가까웠다. '뜻밖이었다.' 나의 예상이나 기대에 완전히 어긋난 카페 외관이었다. 내가 자주 다녔던 카페의 인상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세련되거나 코지한 느낌이 다분했고, 많은 카페들이 그러한 분위기를 추구하는 것 같다. 사실, '코지하다'는 것도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외국어를 좀 써야 세련된 분위기를 단어에 녹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첫 번째 느낀 나의 감정은 조금은 실망스러움에 가까웠고, 그 직후 실제로 카페에 들어갔을 때가 '뜻밖에'란 단어가 적확한 내 마음이었다. 통통하고 푸근한 생김새의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사장님이 카페를 지키고 있었다. 유명 연애 프로그램 '나는 솔로'에서 출연자에게 '첫인상 선택'을 하라고 시키는데, 나는 이 카페를 결코 '첫인상 선택' 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카페 전경과 내부 모두 속된 말로 하자면 촌스러운 분위기였고, 뭔지 모를 기대감과 설렘이 한순간 삭아 없어졌다. 마치 '버뮤다팬츠'가 결국 본질은 '반바지'인데 '반바지'를 입은 사장님에게 결코 '버뮤다팬츠'라는 단어를 고르지 않는 '나'를 보면서 생각해 보았다. '메가 커피', '빽다방', '컴포즈 커피'에서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아르바이트생들의 생기발랄함을 이 카페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다. 카페 전경과 사장님을 보면서 '반바지'의 본질인 '짧은 바지'임이 중요하다는 점을 잊고, '버뮤다팬츠'가 아닌 것에 실망을 한 것일까? 생김새가 투박하고 세련되지 않았다고 그 본질의 '커피 맛'마저 내 입맛대로 예상을 해버린 것일까? 카페에 들어선 단 3초 만에 꽤나 많은 생각과 여러 감정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이야말로 잊지 않아야 할 나에 대한 통찰이 필요한 지점이었다(상담 장면에서도 이렇듯 복잡하고 다채로운 감정이나 생각을 느낀 상황을 가져와 내담자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에 대해 풀어낼 때 통찰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반바지 차림의 사장님은 환한 미소로 환대해 주셨다. 약간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여 나도 미소로 화답한 후 주문을 하고선 차근차근 카페를 둘러보았다. 낡은 영창 피아노, 정갈하지만 예쁘지 않은 손글씨로 쓴 '단체 손님 8인 이상'이라 쓴 팻말, 단체석의 통일되지 않은 여러 의자들.. 8인 이상의 단체석엔 결혼식 후 꾸며낸 인상의 젊은 남녀들이 뒤풀이로 올 것 같지 않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예배 후에 오실 것만 같은 인상을 풍겼다. '이것 보게...' 나의 머릿속은 이미 '자극-반응'의 한 쌍 한 쌍이 세트로 줄줄이 소시지처럼 묶인 채로 떠돌고 있나 보다.

20대 초중반 아르바이트생이 있는 '패스트 커피점'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맛 평가'를 나는 그 자리에서 했다. "정말 맛있습니다."라고. 사장님의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사장님은  "아 오늘은 비가 와서 평소 맛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라며 수줍게 웃으셨다. 다시 살펴보니 촌스럽게만 보이던 가구는 보이지 않고, 수많은 드립커피 용품들과 카페 안을 가득 메운 깊은 풍미까지 느껴지는 커피 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서관 뒤편 작은 골목의 카페는 내가 다녀보았던 수많은 카페들 중 가장 인상 깊고, 강렬한 곳이 되었다. 그리고 최근 이곳을 두 번 더 방문했다. 버뮤다팬츠를 입은 사장님은 나를 이제 기억하시는 듯했다.


나는 본질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에세이 #심리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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