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MOMENT

하루

흐르는

by 박규규

잠이 흘러넘친다. 발이 닿는 곳에 잠이 놓인다. 늘 위태롭게 질질 끌려다니던 잠에게 결국엔 발이 걸려 침대에 넘어진다. 한번 누운 몸은 다시금 활기를 찾기가 어렵다. 해야 할 일. 포스트잇에 적힌 To do list에 머문 내 눈은 곧 시력을 잃는다. 정신을 차리고 책상에 앉을 때 허기는 찾아온다. 익숙한 손님에겐 늘 과한 대접이 필수다. 꾸역꾸역 잘 차려진 식사를 섭취하면 그제야 조금 눈에 빛이 든다. 끓인 물에 커피를 타서 노트북을 켠다. 오늘도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쓴다. 거짓의 뒤통수가 자꾸 슬금슬금 올라온다. 사실과 허구 사이에 줄타기하는 내 존재감은 어디에 발을 디딜지 고민하고 고민한다. 나를 팔기 위해 오늘도 시간을 보낸다.


잘 꾸려진 소시지 꾸러미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에서 다시 다른 하나로 줄줄이 딸려오는 이야기는 이제 어디서부터 시작인지, 어디가 거짓인지 모르겠다. 의심이 확신으로, 확신이 나 자신으로. 그렇게 오늘도 나는 나를 만든다. 눈앞에 과자가 보인다. 조청 유과. 달콤한 부스럼 결정. 손은 그렇게 가고 입엔 자잘한 가루가 남고, 손엔 끈적이는 흔적만 남았다. 또 터질 것 같다. 한숨을 내쉰다. 어느새 부풀어 오른 배를 보고 웃는다. 날씬했던 옛날엔 먹는 것에 죄책감을 몰랐는데 이제는 죄의식 가득한 포만감만 남는다.


지원 완료. 오늘도 나를 값싸게 팔았다. 시장에서 나의 가치는 낮은 듯하다. 값싸고 질 낮은 부품을 원하는 곳은 오늘도 없나 보다. 떨어지는 기분은 좀처럼 바닥에 닿을 줄 모르고 내 다리로 땅을 딛고 서 있는 기분이 어떤 것이었는지 좀처럼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 삶의 만족도는 인생 그 어느 순간보다 높다. 풍요롭게 영글어 톡 치면 잘 익은 과실이 후드득 떨어질 것만 같다. 생산보단 소비가 익숙하고 노동보단 눕는 게 더 익숙한 이 생활의 결실이다. 생각하고 생각하다 생각에서 시간이 머무는 게 좋은 오늘. 밖에 부는 맹렬한 말 떼 같은 바람이 좋다. 흔들리고 흔들리지만 뿌리를 뽑지는 않는다. 뽑힐까 말까, 무너질까 말까. 고민하는 찰나의 순간이 아름다워 보인다. 무너지는 마음. 버티는 마음. 그러니까 살아지는 삶.


오늘은 미래를 생각하기 참 좋은 날이다. 10년 후의 모습을 생각하다 침을 흘렸다. 10년 후엔 침만 질질 흘리는 탐욕스러운 인간이 되진 않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탐욕을 슬그머니 닦아주는 사람이 되진 않을까. 옆에서 무언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얼굴이 빨개지는 갈색을 보았다. 갈색은 늘 어딘가 기대고 싶어 한다. 기댐이 되지 못하는 나는 그저 바라만 보고 또 적고 있다. 빨개지는 갈색과 그 앞에 놓인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을 지닌 초록 시집. 그 둘이 대조되어 보여 조금은 웃었다. 짧은 집중력이라도 초록 시집이 갈색의 위로가 되었으면. 폭동처럼 일렁이는 빨강의 오늘이 보다 더 침잠 수 있길 소망해본다.


고로 오늘은 즐거운 날로 하련다. 최소한 오늘은 나를 이 재난에서 건져줄 유일한 희망인 마스크를 바로 구한 날이기도 하니까.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엉뚱한 서양배가 계속 나를 건드려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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