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눈 뜨고 나니 퇴사 요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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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시작하기 전에, 단어의 어려움이란 정말 끝도 없다는 생각을 한다) 업무란, 직장에서 의무나 직분에 따라 맡아서 하는 일을 뜻한다. 내 식대로 해석하자면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남이 할 일도 아니고, 남이 해도 되고 내가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이다. 그게 업무다.
원래 회사에서 내가 꼭 해야 하는 업무는 '농촌 먹거리에 대한 글을 써서 좋은 먹거리에 투자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이(었)다. 일정 기간 이 업무가 익숙해지면 오프라인에서 일어나는 행사들과 온라인 이벤트들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추가 업무가 예정되어 있었다. 사실 난 전자의 업무에 매력을 느껴서 입사를 했다. 후자의 업무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전자의 업무는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보통 나는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짬뽕해서 일했던 것 같다. 첫 회사에서도 인력 관리(할 수 있는 일)와 오프라인 프로모션 기획(하고 싶은 일)을 겸업했다. 두 번째 회사는 온/오프라인 마케팅 업무(할 수 있는 일)와 농촌 먹거리에 대해 글을 쓰는 일(하고 싶은 일)을 겸업했다. 여담인데 '취직'한다는 것은 누가 더 뛰어나고, 누가 더 스펙이 좋다기보다는 구직자와 구인처의 궁합이 잘 맞아야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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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4개월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이하 마케터)보다는 하고 싶은 일(이하 에디터)의 비중이 좀 더 높았던 것 같다. 한 가지의 작물 혹은 농부에 대해 끝까지 연구하고, 진심을 담아 글을 써서 사람들을 설득하는 작업은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나의 업무 만족도를 높여줬다. 물론 그 와중에도 회사가 원하는 나의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마케팅 플랜을 짜고, 오프라인 팝업 프로모션을 나가고, 온라인 이벤트를 기획하고, 단기 캠페인도 진행했다. 실로 가성비가 넘치는 일꾼이었으며, 야근도 넘치던 4개월이었다.
여기에 변수가 하나 생겼다. 온라인 커머스가 중심인 회사는 기본적으로 판매 수익에 민감하다. 월 별 수익이 떨어지거나 정체되면 리더의 입장에서는 회사의 존속을 위해 계산기를 두드리게 된다. 어디서 가장 크게 지출이 발생되고, 어디서 가장 큰 수익이 발생하는지 살피게 된다. 우리 회사의 경우에는 인건비가 가장 큰 지출, 판매 컨텐츠가 가장 큰 수익이 되곤 했다. 불운하게도 당시 회사의 수익이 정체되었다. 자연스럽게 지출, 수익이 계산되었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판매 컨텐츠 수를 늘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판매 컨텐츠를 늘리는 것은 '단기적'이라는 한계가 있었다. 단순히 판매 컨텐츠 수를 늘리는 것은 잠깐의 대안일 뿐 좀 더 장기적인 대안이 필요했다. 바로 판매 컨텐츠를 구독할 사람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회원 유치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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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유치'(이 단어도 퇴사하기 전까지 참 많이 썼던 단어였던 것 같다)가 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우리의 브랜드를 알리는 활동이 필요했다. 우리 멤버는 당시 7명이었는데, 그중 유일하게 마케팅 경력이 있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렇게 8개월 정도 동안 에디터(80%) + 마케터(20%)로 일 하기로 예정되었던 업무는, 4개월 만에 100% 마케터 업무로 전환되었다.
당시에는 '어차피 할 일이었으니깐...' 하며 조금 아쉬운 수준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 아쉽다. 아무리 회사 사정이라지만 입사 사유였던 '에디터' 업무를 금방 포기하게 되니 이후 업무에서 재미를 금방 잃었던 것 같다. 퇴사하고 나서 돌이켜보면, 입사 시 약속받았던 것이 어긋 났을 때 회사에 대한 애정이 많이 사라졌던 것 같다. 당시에는 나도 동의하며 업무 전환을 했지만 '회사 사정이 이래서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어떻게 본인의 업무를 고집하겠는가? 심지어 나는 업무 전환이 약속되어 있었고, 마케팅 업무를 원래 좋아했다. 당시에는 전혀 문제 될 게 없었음에도 참 그게 아쉬웠다.
그렇게 나는 순식간에 BM(Brand Marketer)가 되었다. 또 새로운 역할에 심취하여 갑작스러운 업무여도 마냥 좋았다. 당시에는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이 브랜드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마케팅 활동들을 다 해보고 싶었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해!라는 생각으로 참 많이도 기획하고 내부 인원들을 설득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말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정말 무슨 케이크 위의 촛불 마냥,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찬 생크림 위에 뜨거운 촛농이 떨어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