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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단단 Mar 08. 2021

직장인의 시간이 빨리 가는 이유

내 삶은 어떤 용량의 저장장치가 필요할까

이 브런치 글은 오디오북처럼 들을 수도 있어요.

오디오로 듣기 (Running time : 5분)



이런 경험이 있는가. 오전에 있었던 일이 어제 일처럼 꽤 오래전 일로 느껴지는 경험. 이렇게 무언가 헷갈리는 날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 때문에 머릿속은 간지럽고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전에 있었던 일이 오늘 같지 않고 아득하게 느껴진다면 난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 날 많은 일이 있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는 참 다양한 경험을 했구나'하며 나 자신을 다독인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인이 된 후로 느낀 것이 있다. 직장인이 되면 시간의 세계가 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이다. 어제 했던 작업이 어제의 일인지 그제의 일인지 헷갈린다. 주초에 했던 보고가 이번 주 일인지 지난주의 일인지 헷갈린다. 난 이럴 땐 기분이 서글퍼진다. 이런 헷갈림은 아침에 일어나서 회사에 오고, 같은 책상에 앉아 비슷한 업무를 하고, 저녁이 되어 퇴근하는, 크게 다를 것 없는 일상이 매일 반복되어서 생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밀도


시간에 대한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는 건 동일한데 왜 나는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 사람은 시간을 '시간' 단위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자기 전까지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은 약 16시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간을 16등분으로 균등하게 나누어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의 뇌는 시간을 의미단위로 나누어 기억한다. 극단적인 경우엔 출근해서 회사에서 보낸 시간, 퇴근해서 집에서 보낸 시간, 이렇게 두 개의 덩이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전에 있었던 일이 어제 일처럼 느껴졌다는 건 오늘 하루가 시간의 밀도가 높았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회사와 집, 이렇게 평소엔 하루를 두 덩이로 기억을 하는 사람이 여행을 갔다고 하자 .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고, 탁 트인 바다를 구경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멋진 숙소에서 맥주를 마시며 야경과 함께 하루를 마무리했다면 이 사람의 뇌는 하루 만에 4개, 5개의 기억을 만들 것이다. 평소 뇌의 습관대로라면 오늘 첫 번째 한 일이 어제, 그제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간의 밀도를 말할 때 내가 많이 드는 예가 있다. 남자들은 군대를 가면 먼저 5주 군사훈련부터 받고, 자대 배치를 받아 약 2년을 군 복무를 하게 된다.(지금은 1년 반 정도다) 군생활이라고 하면 당연히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자대에서의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5주의 훈련병 시절 때의 기억도 매우 생생하다. 시간으로 치면 20분의 1에도 못 미치게 기억을 해야 할 텐데 팔꿈치 나가는 줄 알았던 사격훈련, 눈물 콧물 다 흘렸던 화생방 훈련, 냄새나는 방탄헬멧, 악마 같은 소대장, 동고동락했던 분대원들의 얼굴까지 다 생생하다. 훈련병 때의 시간은 한 달 남짓이지만 태어나서 처음 겪는 사회격리와 군사훈련이라는 경험이 매우 밀도 높은 시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의 기억도 출력이 가능하다면...


해리포터에서 마법 지팡이로 관자놀이에서 기억을 꺼내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의 마지막 날에 나의 인생이라는 기억을 저장장치에 기록한다면 과연 얼마 큼의 용량이 필요할까. 젊은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다해서 USB면 충분하고, 장수를 해야 1 테라 외장하드가 필요한 것은 분명 아닐 테니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내가 100살을 산다 해도 그냥 쳇바퀴 도는 직장인으로 산다면 내 인생은 1기가 USB로도 충분할 것 같긴 하다.


시간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꼭 여행을 가야 하고, 군대를 재입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하루의 시간을 얼마나 진심으로 깊이 있게 살았는지가 시간의 밀도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집에 누워 책을 봤다고 하더라도 책을 읽으며 느끼는 감정의 희로애락과 깨달음이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직장경험에만 빗대어 1기가 USB라고 말했지만, 회사에서 멋지게 자신의 전문성을 발휘하고 성취감과 의미를 느끼며 능동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간의 밀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다보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떠오른다. 죽은 시인의 사회 개회시로 낭독되었던 소로우의 시 중 한 구절로 마무리하려 한다.


'나는 삶의 정수를 살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은 전부 떨쳐버리고, 삶이 다했을 때 후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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