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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단단 Apr 10. 2021

그 날 나는 아무도 모르게 홍당무가 되었다

"못할 수도 있지, 그거 가지고 그러냐!"

어느 여름날, 대학교 공강시간 동아리방에서 동기 누나가 나한테 말했다. 핸드폰에 무언가 설정하는 방법을 알려줬는데 조금 기계치였던 그 누나가 헤맸다. 잘 안되니 나한테 계속 설정하는 방법을 물어봤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왜 이걸 한번에 못하는지 전혀 이해를 못했던 것 같다. 아마 공대생에게 흔히 있는 IT 기계에 대한 오만일 수 있다. '아휴~ 도대체 그걸 왜 못해'라고 내가 말했더니 그 누나가 한 대답이었다.


그렇게 대화는 지나가고, 동아리방에서 신나게 수다 떨면서 공강시간을 보내고 각자 수업으로 흩어졌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나간 일상의 한 순간이었지만, 나에게 이 한 두 마디의 상황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 누나의 핀잔 어린 말과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고, 당황한 내 얼굴의 온도가 생생하다. 왜 이 별거 아닌 사건이 나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일까.




나의 어떠한 행동으로 상황을 그르쳐 다른 사람에게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 일. 실수의 사전적 의미는 부주의로 인한 잘못을 의미하지만 나에게 실수란 이런 느낌이 강하다. 내가 생각하는 실수는 아래의 두 요소를 갖고 있다.


1. 상식이나 예상에 어긋난 말과 행동

2. 그 공간의 분위기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


실수에 대한 이런 나의 정의에 의하면 동아리방에서의 상황은 실수가 아니다. 상식에 벗어나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한 그런 말이 아니었다. 그냥 친구들끼리 투닥거리며 하는 대화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공간의 공기도 아무런 난처함이 없었다. 전부 그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렇게 모두에게 그저 흘러가는 평범한 대화가 되었을 뿐이다. 단 한 사람, 나만 빼고 말이다.




입학 때부터 대학교 내내 수학 과외를 했다. 과외비가 곧 나의 생활비였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았다. 학생이 어려워하는 지점을 알아내고 그 부분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 알려주는 일이 재밌었다. 과외 중 이런 순간이 반복되면 학생도 나도 서로 하이파이브를 치고 싶을 정도로 뿌듯한 감정이 생기곤 했다.


이렇게 과외를 계속하다 보니 학생도 만족하고, 학부모님도 좋아하셨다. '선생님, 우리 애가 선생님 수업을 너무 만족해 해요! 친절하시고 이해도 잘 된다네요, 감사해요' 나도 감사한 마음에 더 노력했고, 좋은 피드백은 더 늘어났다. 그래서 나도 나를 꽤 그런 사람으로 생각했다. 이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못할 수도 있지, 그거 가지고 그러냐"

이 한 마디가 내 뒤통수를 때렸다. 원래 사람은 어느 정도 예상을 하면 놀라지 않는 법이다. 나는 뒤통수를 맞은 듯이 놀랐으니, 전혀 예상을 못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흘러가는 대화 속에서 나는 잠시 대화로부터 빠져나와 있었다. '당연히 처음엔 못할 수 있는 건데, 왜 이 생각을 전혀 못한 거지?' 이 감정은 당혹감이었다. 실상을 알게 된 당혹감, 나조차도 속일 만큼 완벽하게 포장하고 있었음을 들킨 당혹감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겨우 이 정도 일로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것 아니야?' 아니다. 사람의 본심은 찰나의 순간 드러난다. 나의 진짜 뱃살을 언제 알 수 있는지 아는가. 거울 앞에 서서 몸을 확인할 때가 아니다. 어떤 일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걸려온 모르는 전화를 받을 때다. 전화를 받고 '여보세요'라고 말하는 그 찰나의 순간, 그 배의 출렁임이 진짜 나의 뱃살이다.


부지불식 간에 뱉은 나의 말과 그 순간 누나의 대답에 동아리방에서 나의 뱃살이 출렁인 것이다. 아무도 못 봤지만 나는 한껏 출렁이는 나의 뱃살을 보고 홍당무가 된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그 누나에게 살짝 사과의 말을 전했다.


"누나... 내가 동아리방에서 그것도 모르냐고 말한 거 미안해. 그걸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했어..."


아, 혹시 이 말이 그 누나를 두 번 죽인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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