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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단단 Apr 21. 2021

나는 내 언어만큼의 존재

영화 <컨택트>로 본 언어

언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언어의 경계 부근만큼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예전에 친구가 윤슬이라는 단어를 아냐고 물었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가리키는 말이다. 전에도 바다를 많이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그 단어를 알게 된 후의 나는 바다를 볼 때 '윤슬이 찬란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언어의 확장으로 바다를 감상하는 나의 세계가 확장된 것이다.




<컨택트>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루이스는 언어 학자로서 외계 존재와 소통해야 하는 임무를 맡는다. 루이스가 처음들은 외계 존재의 음성은 이랬다.

"으어어워어~~~ 푸드드득~"

이건 언어라기보다 영화에서 본 공룡의 그르렁거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구에 온 미확인 비행 물체와 외계 존재는 어떤 공격도 하지 않고 그저 인간의 질문에 이런 소리만 내고 있었기에 인간은 어떻게든 소통을 해서 '지구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했다.


아예 다른 두 존재의 언어 소통이 그렇게 시작된다. 루이스는 자신을 가리키며 'HUMAN'이라는 글씨를 보여주고, 자신의 이름과 동료의 이름도 보드에 써서 보여준다. 외계 존재도 그때마다 알아보기 힘든 어떤 그림을 스크린에 쓴다. '걷다', '말하다', '주다' 등 단어를 점점 확장해가기 시작한다. 단 하나의 질문 '왜 지구에 온 것인지' 물어보기 위해서다. 이쯤 되면 SF 영화가 아니라 소통과 이해를 주제로 하는 언어학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안녕 다른 존재!  난 휴먼이라고 해!


길고 힘든 노력 끝에 외계의 언어를 깨닫기 시작하는 루이스는 신비한 경험을 하기 시작한다. 특별한 꿈과 환상을 보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자신의 미래임을 알게 된다. 어떻게 루이스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된 것일까. 외계 존재는 시간을 초월한 존재라 그들의 언어에는 시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의 축에서 자유로운 비선형적인 외계 언어를 습득하며 루이스의 인식 체계에 변화가 일어나 미래를 보게 된 것이다.


어떤가. 인문학 영화인 줄 알았는데 그 허무맹랑함이 역시 SF영화라는 생각이 드는가.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다. 루이스는 영화의 시작에서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너무 시간에 매여있어. 그 순서에...
이젠 내게 처음과 끝은 별 의미가 없어.
네 삶 너머에도 네 이야기는 존재하니까..."


시간을 초월한 언어로 미래를 보게 됐다는 설정은 SF였을지 몰라도, 그 언어로 인해 시간에 매이지 않는 깨달음 얻은 루이스의 모습은 삶의 진실 그 자체였다. 시간이라는 굴레에 있는 인간이지만 그 너머에 있는 소중함을 보고 선택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시간에 속박된 나의 생각과 인식을 가만히 마주하게 되었다.


실로 인간은 언어의 존재다. 영화 초반부에 언어학자인 루이스와 물리학자가 문명의 초석을 각각 언어와 과학이라고 서로 주장하는 모습이 나온다. 공대생인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암, 과학이지'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가만히 언어에 한 표를 던지게 됐지만. 각 문명은 각자의 생존에 필요한 개념과 문화가 그 문명의 언어로 체계화된다. 현대사회의 언어와 수렵하던 선사시대의 언어가 같은 체계와 구성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문명이나 사회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내가 윤슬이라는 단어를 알고 난 후 새로운 감정을 느꼈던 것처럼 단어 하나에도 모르던 세상이 열리는 게 사람이다. 길거리의 많은 사람들은 겉보기엔 엇비슷하게 보일 테지만, 사실 각자가 경험하는 세계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그리고 그 세계는 각자의 언어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삶을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 무엇에 매여있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어떤 인생을 추구하는지, 얼마큼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지, 삶의 풍요로움의 폭은 어떠한지가 그대로 그 사람의 언어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정확히 내 언어만큼의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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