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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단단 May 22. 2021

테스형은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우리가 철썩 같이 믿었던 법원의 실상

* 살짝 끓어오르는 공분을 누르며 쓰느라 글이 약간 상기되어 있는데 너그러이 양해 부탁드립니다 :)


내가 아는 민주주의는 잘못을 되돌릴 수 있는 곳이다. 민주주의는 뛰어난 리더가 혼자 결정해가는 사회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함께 결정해가는 사회다. 그래서 불완전할 수 있다. 어떤 시기에 사람들의 감정이 격해져 다 같이 그릇된 선택으로 나쁜 대통령을 뽑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임기는 5년이다. 5년이라는 값을 치러야 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잘못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곳이다. 다시 선택할 수 있다는 게 민주주의의 진짜 힘이고, 그래서 지금까지 가장 최선의 정치 체제로 살아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행정부의 대통령도 5년마다 다시 국민들이 되돌릴 기회가 있고, 입법부의 국회의원도 4년마다 국민들이 선택을 하는데, 사법부의 판사는 민주국가의 국민에게 결정권이 없다. 삼권분립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첨탑의 끝에 있는 느낌이다. 검찰개혁이 계속 우리 사회의 이슈가 되는 것도 검찰 조직이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 때문이 아닌가. 검찰은 행정부지만 어쨌든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위에 군림한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세상에서 한 인간의 생사를 결정하는 건 신만 하는 게 아니다. 판사도 한다. 그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는 건 신뿐만이 아니다. 판사도 그렇다. 민주주의의 정점에 있지만 전혀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 조직, 그래서 기본과 상식의 소리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비장함이 되어야 하는 조직, 저자인 최정규 변호사가 책을 통해 고발하고 있는 조직, 바로 법원이다.


저자는 현직 변호사로서 법원의 불합리한 행태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 고발하고 있다. 오늘도 당장 법원에 가서 판사에게 '존경하는 판사님'을 외쳐야 하는 변호사가 이런 책을 쓴다는 건 감히 행동에 옮기기 힘든 용기라고 생각한다. 저자도 법조인이지만 법조인의 시각에서 벗어나 국민의 시각에서 법원에 대한 날 선 비판을 하고 있다. '날 선 비판'이라고 했지만 사실 '최소한의 기본'을 주장하고 있다. 법원의 '최소한의 기본'을 주장하는 일이 '날 선 비판'이 되고 위험을 무릎 쓸 일이 되어야 하는 게 씁쓸할 따름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법조계에 있는 저자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게 된다.


용기있는 변호사, 최정규의 <불량판결문>



테스형은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유명한 말의 힘은 대단하다. 실제가 아닌 루머일지라도 일단 유명한 말이 되고 나면 누군가의 논리에 수도 없이 인용되고 재사용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어디서 나온 말인지는 몰랐다. 이 말은 일본 군국주의 시대의 법철학자인 오다카 도모오가 소크라테스의 독배를 해설하며 나온 말이라고 한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군사정치로 전쟁을 일으키고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던 일본의 당시 철학자가 한 말이라니.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는 왠지 한국에서만 퍼진 말일 듯하고, 악법을 법이라고 생각을 해도 한국 사람이라면 이 인용만은 쓰면 안 될 듯하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법은 항상 법적 안정성과 구체적 타당성이라는 두 가지 가치가 충돌한다. 법적 안정성은 보수적으로 기존 법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다는 가치이고, 구체적 타당성은 해당 상황에서 상식에 부합하는 지를 보는 것이다. 예로 16년 고 김홍영 검사의 자살 사건을 봐보자. 이 자살 사건은 상사였던 부장검사의 폭언, 폭행 때문임이 확인되었으나 대검찰청은 형사처벌 사안이 아니라고 결론 냈다. 이후 검찰수사심의위원회가 소집되어 다시 살펴본 회의에서는 아래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고 한다.


대검찰청이 형사처벌 사안이 아니라고 이미 판단했으니 존중되어야 한다.
vs
폭행, 폭언을 이미 인정하면서도 형사처벌 사유가 아니라는 것은 상식에 반한다.

- 최정규 <불량판결문>  1장 중


'훔쳤지만 도둑은 아니다', '술 마시고 운전했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우스개 변명들이 오버랩되는 건 왜일까. 왜 이 두 주장이 팽팽히 맞서야 하는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 당황스럽다. 폭행, 폭언의 주체가 부장검사가 아니었으면 결과는 어땠을지 궁금하고, 법 체계와 기존 결정의 안정감이 사건의 실체와 상식보다 중요한 것인지 궁금하다.



판사마다 180도 다를 거면 AI가 낫지 않겠어요?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처벌불원서를 제출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조작된 것은 아닐지, 피해자의 진의가 왜곡된 것은 아닐지 판사들이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확인한다고 한다. 그런데 2014년 한 재판에서 선고기일 3일 전에 제출된 피해자의 처벌불원서가 바로 날치기 통과가 됐다. 심지어 그 피해자는 자신의 이름 석 자와 생년월일만 겨우 적을 수 있는 지적장애인이었는데 말이다. 이름과 생년월일만 꼬불꼬불하게 겨우 적혀있는 처벌불원서를 보고 어떻게 바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가해자의 변호인이 해당 법원 판사 출신이었다고 한다. 전관예우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이렇게 판사마다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는데 판사라는 개인에게 판결을 온전히 맡기는 게 합리적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럴 거면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재판을 뒤집을 만한 처벌불원서쯤은 AI가 처리하도록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인재가 발생하지 않으려면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는데, 다름 아닌 재판장에서 인재가 발생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든다.



권력의 독점은 이렇게나 답이 없는 것..


왜 일반 국민은 불친절한 판결과 잘못된 판결을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그래서 불량 판결문에 대해 상고심이나 국가배상 제도가 있지만 저자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싸움일 뿐이라 얘기한다.


"불량 판결문에 대해 A/S를 받기 위해 국가배상 소송을 했는데 결국 받아낼 수 있는 판결문이 또 하나의 불량 판결문이라면 법원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모은 돈을 지불해 구입한 자동차에 문제가 있어 A/S를 받아 다른 자동차로 교환했는데 또다시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 회사 자동차만 봐도 속이 상한 것처럼 말이다."

- 최정규 <불량판결문>  5장 중


그래도 자동차면 다행이다. 다른 자동차 회사를 선택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국민이 믿을 곳은 대한민국 법원 하나일 뿐 다른 보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법원이 잘못했다고 법원에 문제를 제기하니 당연히 법원은 잘못이 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없다. 권력의 독점이 이렇게나 답이 없는 것이다.



수년간 차별받은 장애인? 20만 원으로 위로받고 돌아가세요


책을 읽다 보면 소위 피꺼솟 되는 부분이 많은데, 위자료 부분도 그렇다. 위자료란 피해자가 받은 정신적 충격을 금전적으로 위로하기 위한 제도다. 2018년 우체국 은행으로부터 수년간 차별당한 장애인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피해 장애인들이 1심 재판부로부터 인정받은 위자료는 겨우 인당 50만 원이다... 심지어 항소심 재판부는 거기에서 30만 원을 깎았다. 이건 위로가 아니라 농락이 아닌지 책을 읽으며 두 눈을 의심했다.


저자는 이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 막말하는 판사의 사례도 많이 들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신처럼 우대받는 판사의 비상식과 불합리를 마주할 때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무력감과 허무함이 밀려온다. 무엇이 문제일까. 사법시험과 연수원 성적으로 150등까지 판사, 300등까지 검사를 뽑는 제도가 문제일까. 그냥 시험 보는 머리가 아니라 인성과 감성과 상식을 갖춘 사람으로 법조인을 뽑으면 안 되는 걸까. 저자는 사법연수원에서 법조 원로가 특강을 할 때도 800명 중 절반은 딴짓을 한다고 얘기한다. 심지어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시험 교재를 대놓고 꺼내 시험공부를 한다고... 당시 연수생들의 비윤리적인 태도에 쓴소리 한마디 안 하는 원로 법조인의 모습이 더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나는 적어도 판검사 선발엔 이런 연수생들을 모니터링해서 성적에 반영하길 건의하는 바다.


저자는 앞서 말한 장애인 차별 사건에 대해 20만 원짜리 위자료 대신 이런 제안을 한다.

"장애인 차별 사건의 경우 이런 모습을 상상해본다. 지금까지 장애인 차별 행위를 감행한 우체국 은행의 책임자 우정사업본부장이 피해 장애인들에게 사과하고 장애인들을 우체국 은행에 초대해 체크카드를 직접 개설해주면 어떨까? 개선 방안으로 2018년 중 만들겠다는 장애인 응대 매뉴얼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한 금융위원장이 피해 장애인들에게 사과하고 뒤늦게나마 장애인 응대 매뉴얼을 만들었다고 알려주면 어떨까? 20만 원짜리 위자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피해자들에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 최정규 <불량판결문>  3장 중


감동이다. 이런 게 진짜 위자료다. 무엇이 사건의 본질인지 안다면 무엇이 피해자에게 진정한 위로인지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법원이 이런 법원이 될 수는 없을까. 너무 이상적인 모습이라 위자료 금액만이라도 판사 개인의 판단에 맡기지 말고 합리적인 기준을 마련했으면 좋겠다.






얼마 전에 정인이 사건으로 진정서를 써본 일이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진정서는 쓰는 방법이란 게 있었다. 그중 하나는 '존경하는 재판장님'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글은 재판장의 심기를 건드는 말을 하지 말고 예의 있게 서술해 나갈 것 등이 적혀있었다. 당시엔 정인이에 대한 간절함으로 그런 가이드를 잘 지켜 썼지만 다시 돌이켜 읽어보면 마치 신에게 드리는 기도문같기도 하다.


이렇게 저자세로 글을 쓸 일인가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건 온전히 판사 개인이 결정하는 일이다. 정인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저자세일 수 있다. 이게 재판장에 선 모든 일반인의 마음이겠지... 하지만 판사도 국민의 일원이고 사람이다. 최정규 변호사님은 이렇게 말한다.


"재판장의 품위 없는 말에도 우리의 언행은 품위를 유지했으면 좋겠다.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는 판사가 아닌 우리가 법정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 최정규 <불량판결문>  5장 중


사람들 간 정치 얘기를 하다보면 끝은 "그 일, 재판에서 무죄래"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당연히 우리는 사회의 일원으로서 법의 결정을 신뢰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가 법정의 주인이다. 법의 결정 앞에서도 맹목적 신뢰는 잘못된 일이 된다. 같은 일에도 180도 다르게 대처하는 판사도 있고 시기에 따라, 운에 따라 위헌과 합헌이 갈리기도 한다. 판사에 대한 제도적 견제 장치가 반드시 생겨야 하는 게 첫 번째라고 보지만 그 날이 오기 전까지 우리 모두가 법원과 판사에 대해서 잘못된 것은 잘못됐다고, 상식에 어긋난다고, 기본을 지키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엄연히 악법은 있으며 불량판결문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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