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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단단 Jun 04. 2021

행복을 위해 기대를 낮추라고요?

'기대'를 생각하다

나의 행복론에서 '기대'는 크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단어의 경계를 산책하기] 매거진에서 나의 행복론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을 텐데, 기대는 그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이런 말을 한다.


기대를 너무 높여서 자신을 불행 속에 넣지 말라고..

기대를 낮춰 소소한 만족을 느끼며 살라고...


가끔 기대가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나는 기대를 행복이란 실험의 조작 변수로 넣고 싶지 않다. 기대하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 기대를 인위적으로 높이거나 낮추는 일은 본성을 억지로 통제하는 일로 느껴진다. 내 마음속 기대가 크든 작든 그것은 나의 정체성이다. 기대를 낮추라는 말은 자신의 무언가를 포기하라는 말인데, 그 말 자체로 나는 서글픈 감정이 든다.



기대하지 마, 실망만 큰 법이니까...


기대는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기다린다는 뜻이다.(표준국어대사전) 사람은 누구나 본인이 생각한 대로 현실이 흘러가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선사시대의 어느 어두운 밤, 인류가 움막에서 잠을 청하며 맹수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랄 때부터 항상 있었던 마음이다. 기대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고이자 본능이다. 의도를 갖고, 시도를 하고, 피드백을 통해 발전을 도모하는 건 사실 인간뿐만이 아닌, 동물의 본능이다. 하지만 동물도 사람처럼 기대가 커서 불행할까. 내 친한 친구의 강아지는 전혀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순대 먹을 때 더 받아온 간을 오랫동안 주지 않고 있으면 뾰로통해지긴 하지만... 동물도 자살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들었다. 모르긴 몰라도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률은 인간보다는 낮을 거라 확신한다. 동물은 사람보다 기대와 행복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기대와 행복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 질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성취형의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계획을 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안정감 혹은 행복을 느끼는 사람 말이다.(무계획인데 큰 기대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 나의 MBTI는 계획하는 타입인 J형이다. 지금은 적당한 수준이지만 어릴 때는 극 J였다. J들은 계획한 대로 하루가 흘러가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이 든다. 이것도 작은 기대라면 기대랄까. 일상의 사소한 일에도 이런데 큰 일은 오죽할까. 예기치 않은 큰 파도는 누구한테나 올 수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 파도를 쓰나미처럼 느낀다.


나는 파도에 몸을 맡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학교에서는 시간 계획을 짜고 그대로 공부해서 성적을 올리는 법만 배웠기에, 파도치는 바다에 던져졌을 때 계획 따위 소용없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아니, 세상이 파도치는 바다일 거라는 생각조차 없었다. 그렇게 대책 없는 상태로 세상에 던져졌다. 이건 지식의 문제가 아닌 지혜의 문제였고, 어린 나에게 내가 아는 지혜란 친구들 이름밖에 없었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지네요!


<빨간 머리 앤> 애니메이션에서 엘리자가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아'라고 한 말에 앤이 이렇게 얘기한다.

누가 내 뒤통수 때리냐? 앤이냐?


논리 시험이었다면 앤은 낙제했을 거다. 'A는 A이기 때문이다'라는 원인과 결과가 동일한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력 시험이었어도 같은 표현을 피하고 구체적으로 서술하라는 코칭을 받지 않았을까. 하지만 난 5년 전 우연히 본 이 만화 컷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동어반복의 단 두 마디가 잊히지 않고 머릿속을 계속 떠다니고 있다. 기대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데 앤의 표정은 왜 저렇게 해맑지? 또 그 이유는 '기대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니 무슨 말이지?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라는 명제 아래에서는 앤의 말은 해석이 되지 않는다. 기대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상황이다. 앤은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즐기고, 오히려 은근히 바라는 듯한 모습이다. 앤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기대를 하지만 그 결과에 앤의 기분과 만족감이 좌우되지 않는다. 앤에게 기대와 행복은 분리되어 있다.


앤은 파도에 몸을 맡기는 모습이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몸을 맡기고 파도를 즐기고 있다. 숙련된 서퍼같다. 바다와 파도를 읽고 흐름에 따라 행동을 결정한다. 나는 파도가 오든 말든 상관없이 내 근육과 계획만 믿는 초보 서퍼다. 나는 아등바등 무한 패들링으로 힘 빼다가 다가오는 파도를 정통으로 맞고 넉다운돼서 '생각처럼 안되네~'라고 읊조리며 실망하는 초보 서퍼다.


우리도, 앤도 심지어 동물도 기대한 바가 이뤄지면 당연히 기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엔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욕망 때문에 기대의 실현 여부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그 욕망이 융통성이 없고, 촘촘하고, 편협하고, 거대할수록 우리는 필연적으로 불행해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확실성의 매트릭스가 아니라 불확실성의 바다이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물을 가두려는 데에서 우리의 모든 고통은 시작된다.




우리는 보통 기대를 부담스러워한다. 부모님이 나의 결혼과 성공을 기대하고, 회사 상사가 나의 성과를 기대하는 게 부담스럽다. 기대에 숨 막히는 우리는 화가 나서 발끈하며 꼰대문화를 지적하기도 한다. '저 좀 내버려 두세요! 뭘 좀 기대하지 마세요. 저 알아서 살게요!' 이렇게 말은 하지만 사실 나 자신의 기대는, 아니 나 자신의 편협한 욕망은 정작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대한 대로 되지 않는 것이 실패고 불행이라는 공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대와 행복은 다른 축이 되어야 한다. 존경하는 앤 님의 명언에서도 봤듯이, 기대와 행복은 독립적인 개념이 될 수 있다. 기대의 충족이 아닌, 다른 것에서도 우리의 행복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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