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단단 Jul 11. 2021

사랑에 대한 단상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소설인 줄 알고 읽었다가 철학책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책. 어떻게 보면 평범한 연애 이야기인 간단한 플롯이지만 그 순간들의 상황과 심리들을 파고드는 이야기가 흥미로운 책.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몇가지 인상적인 구절과 그 연애의 순간들을 모아 보았다.



사랑의 윤활유, 유머
유머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 자극물 위를 미끄러져 넘어갈 수 있었고, 그것을 비스듬하게 바라보며 눈을 찡긋할 수 있었고, 실제로 말을 하지 않고도 비판을 할 수 있었다. 차이를 농담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표시일 수도 있다.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97


책에서 제일 공감한 부분. 사랑에 있어서 유머라는 자질은 그저 음식의 조미료 정도로 생각되는 요소지만, 나는 관계의 필수적 요소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욕망이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욕망이 완벽한 퍼즐을 이루어 문제없이 맞아떨어지는 경우는 없다. 필연적으로 충돌을 발생시킨다. 둘의 마음은 사랑이라는 진심인데, 필연적인 충돌과 상처가 있을 수밖에 없다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현실인가.


이를 해결해 줄 화려한 근의 공식이나 완벽한 황금률은 없다. 충돌면에 윤활유를 발라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것이 방법이다. 그 윤활유가 유머다. 유머는 옵션이 아니라 필수다. 생각보다 쉬운 일도 아니다. 진심 어린 사랑의 본심을 잃지 않아야 할 수 있다. 서로 상처를 내고 싸우는 상황에서도 사랑이라는 진심에 집중할 수 있어야 '피식'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네가 나와 달라서 좋고, 달라서 싫어
나는 내가 앞으로 클로이에게 발견할 모든 차이를 생각하며, 그녀는 그녀고 나는 나일 그 모든 시간, 우리의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는 시간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창 밖으로 월트셔의 시골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마치 길 잃은 아이처럼 내가 이미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 그 집, 부모, 역사의 특이한 점까지 이미 다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갈망했다.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85


우리는 누군가를 나와 다르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와 존재에 대해 감탄과 호기심과 행복과 환희를 경험한다. 또 동시에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 큰 차이에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음에 버거워한다. 그렇게 사랑은 매혹적인 이질감을 동경하고, 안정적인 동질감을 갈구한다.


우리는 다름에 끌리면서도 두려워한다. 모순이라기보다 극단이란 것이 없는 이 세상에서 당연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어렵지만 사랑하는 두 사람의 이 적정선이 맞아떨어질 수만 있다면 둘의 사랑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이 천생연분인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개인적으로는 당황스럽게 느꼈던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관계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직 나만이 너를 이래서 사랑해
보는 사람의 눈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면, 보는 사람이 시선을 거둘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러나 어쩌면 그것 역시 클로이의 매력의 한 부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움에 관한 주관적 이론은 기분 좋게도 관찰자를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만들어버리므로.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105


주인공은 '나는 내가 플라톤주의자들보다 클로이를 아름답게 여긴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멋지고, 마음이 예뻐 보여서 줄을 긋긴 했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이 이것뿐이라면 그냥 넘어갔을 거였다. 뻔하다. '주관도 없이 남이 좋다고 하는 아름다움을 좇아 살지 말라'는 말은 평생 들어온 말이다. 미에 대한 주관적 관점은 누구나 당연히 가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 구절에서 주인공은 주관적 관점으로 아름다움을 보는 사람에게 권력이 있음을 말한다. 관찰자를 대상자에 대한 필수적인 존재로 만든다. 아름다움에 대한 주관적 이론이 더욱 매력적으로 생각되는 지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적 이론을 공고히 해나간다면 특별해지는 존재는 그 대상과 나, 전부가 된다.



사랑하려면 자기 자신부터
대부분의 관계에는 보통 마르크스주의적인 순간이 있다.(*사랑하고 갈구하던 것을 얻었을 때,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실망하게 되는 심리) 그 순간을 어떻게 헤지고 나아가느냐 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혐오 사이의 균형에 달려 있다. 자기 사랑이 우위를 차지하면, 사랑이 보답받게 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수준이 낮다는 증거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었다는 증거임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72


모든 사람에게 어느 정도 마르크스주의적인 심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예 저런 사람은 노답이다. 알랭 드 보통의 말대로 자기혐오로 인해 자기모순에 빠지는 인생인 것이다. '누군가를 이상화 -> 갈구 -> 보답 받음 -> 자기혐오 작동 -> 이상적인 존재에 대한 실망' 이런 악순환의 고리다. 그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자기 자신부터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내 사랑은 '사랑해'라는 말로는 표현이 안돼
사랑, 헌신, 홀림, 이런 단어들은 계속되는 사랑 이야기들의 무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바람에 생긴 켜때문에 다 닳아버린 것들이었다. 내 사랑을 'ㅅㅏㄹㅏㅇ'이라는 말속에 담는 동시에 가장 진부한 연상들은 쓰레기통에 버릴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p115


사실 나는 예전에 교회 다닐 때, 교회 용어나 말투에 거부감이 많았다. 그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라 그 말들은 너무 많이 습관적으로 사용돼서 대부분 말의 껍데기만 단단해져 있었다. 그 용어와 말투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신실하다고 '착각'되어 대부분은 진심이 담기지 않거나, 있어도 전달되지 않았다.

일상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임만 끝나면 단체 카톡방에 복붙 하듯 줄줄이 올라오는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가 기계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럴 때 나는 대단하지 않지만 다른 말로 인사한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좋은 밤 보내세요!'


이렇게 상투적인 말을 쓰지 않고 의도적으로 다른 어휘들로 표현하는 게 은근히 쉽지 않다. 상투적인 말을 쓰지 않고 설명하려다 보면 본심은 더 느껴지긴 하지만 힘들게 에둘러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주인공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나의 특별한 사랑을 다른 수많은 뻔한 사랑들에 쓰인 언어에 그대로 담기 싫었던 것 같다. 새로운 그릇에 특별한 사랑의 의미를 정확히 담고 싶었던 것 같다.그래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주인공 : 나는 너를 마시멜로해!

클로이 : 내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야.


그래... 너네 둘이 행복해라....




나온 지 꽤 오래된 책이다. 알랭 드 보통이 지금 한국 나이로 53인데 25세에 쓴 책이라고 한다. 이렇게 오래된 책의 세련됨에 놀라고, 사랑의 순간들에 대한 깊은 통찰력들이 25세 작가에게서 나왔다는 점도 놀랍다. 연애 중 직접 겪어야 깊이 생각해 볼만한 흥미로운 주제들을 책을 읽으며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책 한 권으로 연애의 전 과정을 다시 한번 겪은 느낌이다.


아, 이게 소위 말하는 '글로 배우는 연애'라는 것인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매거진의 이전글 가끔은 이런 대화 나누고 싶을 때가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