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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Aug 28. 2022

도시에는 없는 것

 어렸을 적이나 지금이나 은편은 리 단위의 작은 마을이다. 현재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아 풀이 무성하게 자란 놀이터가 장승 옆에 있지만 예전에는 그 모습이 사뭇 달랐다. 20년 전에는 추풍령역에서 기찻길을 건너 조금 걷다 보면 큰 터널이 있었다. 터널 위로는 차들이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였고 옆으로 잔디가 깔린 비탈길이 있었다. 터널이 끝나는 지점부터 초가가 있었지만 마을 간판이나 목조 장승, 팔각정과 느티나무는 평지를 꽤 걸어 들어와야 했다. 할아버지 집은 대문이 빨강색이라 팔각정에서 조금만 위로 걸어 들어오면 눈에 띄었다. 경사진 면에 위치해 있어 아무리 담을 쌓아도 사람이 지나다니며 힐끔 쳐다보기 딱 좋은 곳이었다. 아버지는 현재 집안 사정으로 할아버지 집에서 살고 있지는 않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지내고 있다. 그곳에 가는 게 매번 즐거울 순 없지만 막상 가고 보면 목가적인 아취에 취해 이것저것 신기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령 도시에는 없는 것들이.


 역사 근처 고깃집에서 식사를 했다. 고기를 먹고 여느 때와 같이 공기를 시켰더니 웬걸. 수북하게 담긴 밥이 얼마나 뜨겁던지. 농사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참을 시켜 먹거나 어느 식당을 가도 밥은 항상 넉넉했다. 차가운 철제 밥그릇에 따뜻하게 담긴 그 밥 한 공기에 인심이 후하다느니 사람들 마음씨가 곱다느니 같은 말은 삼가겠지만 배가 꽉 차긴 했다.

 밥을 먹고 가게를 나서는데 밤공기가 쌀쌀했다. 가을에 접어들어 그런지 밤낮으로 일교차가 꽤 심했다. 아니나 다를까 날씨 변화를 기계처럼 알아차린 코가 콧물을 쏟아내더니 훌쩍훌쩍 세계관에 발을 들여놓게 했다. 환절기에 비염이 심해진다는 걸 간과하고 있다 상비약도 두고 온 날 하필 콧물이 터져버렸다. 급하게 약국을 찾았는데 아무래도 외관이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았다. 다 낡아 무너질 거 같은 미닫이 유리문. 투명한 유리 사이로 보이는 진열대. 그 낡아빠진 곳에는 내가 찾던 게 무엇이든 타이레놀 하나도 없을 것처럼 생겼지만 급한대로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생각보다 아늑한 분위기에 80년대 세트장을 그대로 옮겨 놨다고 해도 믿을 만한 장식장들. 할아버지 약사님은 친절하게 복용법까지 알려주셨는데 판매하는 약에 대해 자부심이 있으신 듯해 신뢰가 갔다. 오래된 장식장에서 풍기는 나무 냄새가 아직까지 풍기는 걸 보면 골동품의 가치를 알 거 같았다. 뭐든지 쉽게 버려지는 곳은 아니었던 게 확실하다.

 다음 날 아침에 복용하라는 할아버지 약사님의 지시를 무시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편의점 커피를 마시며 한 알을 삼켰다. 금방 증상이 호전되진 않았지만 흐릿하던 정신이 맑아진 듯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나니 콧물도 덜 나고 먹먹하던 귀도 뚫려 상쾌하게 부엌으로 들어서는 순간 너무 큰 귀뚜라미 소리에 깜짝 놀라며 설거지를 하던 엄마에게 말했다.

 "귀뚜라미가 집 안에 있는 거 같은데?"

 아무렇지 않은 엄마 그리고 그 다음날 김천의 작은 카페에서도 들리던 귀뚜라미 소리가 다소 공포스러웠던 건 언제든 습격당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쫓으려고 찾아봐도 보이지는 않고 들리기만 한다는 게 신통방통하기도 했다. 귀뚜라미와의 동침이 썩 반갑지는 않았지만 그들도 잠은 자는지 한밤 중에 깨지는 않았다.


 나흘간 일손을 거들어 드리고 할 일이 없어 생각보다 일찍 나서게 됐다. 하루도 못 도와드릴 땐 일을 하고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는데 그날은 마냥 기분이 좋아 내내 흥얼거리며 내려갔다. 확실히 기차보다는 운전해서 오가는 게 나은 점이 있다면 조수석에 마음껏 먹거리를 펼쳐놓을 수 있고 음료도 눈치 보지 않고 마실 수 있으며 고성방가 할 수 있다는 것. 이것들도 도시에 없을 수밖에 없는 건 성공적인 효도 후에 누릴 수 있는 가뿐한 것들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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