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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May 26. 2022

불편한 편의점

2022 원북원부산

편의점 야외 테이블은 확실히 동네의 쉼터이자 작은 여유가 있는 곳이다. 그녀가 수차례 민원과 직원들의 불평에도 이곳을 없애지 않은 이유였다.
-불편한 편의점-


 배운 대로 되는 게 없었다. 흥부놀부, 장화홍련 같은 한국 고전뿐만 아니라 신데렐라, 백설공주 등 서양 고전에서도 짙게 깔리는 권선징악 개념은 어렸던 나에게 ‘살맛 나겠구나’하는 환상을 심어 주었다. 100세 시대에 30살이면 이제 막 30% 산 건데 뭘 알겠냐만 지금까지 느끼기엔 그렇다. 세상이 꼭 보응이라는 원리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선‧악만큼 구분하기 지난한 게 없다. 인생이 담겼다고 하는 책 한 권도 완독한 사람이 평가할 수 있는데 사람의 허물을 그 자리에서 선과 악으로 나눌 만큼 신은 단순하지도 단호하지도 않았다. 흥부가 재산을 탕진했을지, 신데렐라가 권력에 눈이 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세상이 배운 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고전이 꾸준히 사랑받는 걸 수도 있겠다. 어떻게 저런 게 인간이라고 돌아다니냐며 뉴스를 보고 혀를 끌끌 차도, 길거리에 내놓기가 불안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원을 표표히 부유하는 게 현 세태라도, 고전이 여전히 읽히는 건 권선징악을 믿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정의, 희생, 사랑 같은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따뜻한 사람이 좋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땐 편안하다. 스스로 따뜻한 사람이 되는 건 뿌듯하다. 영화나 드라마, 도서도 마찬가지다. 옅은 미소를 짓게 하고 빨리 보거나 읽는 게 아깝기까지 한 것들은 보통 포근한 작품들이었다. 인종 차별을 아늑하지만 날카롭게 그린 영화 ‘더 헬프’, 박완서 씨의 다정함을 품은 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첫인상에 내가 이 작품과 사랑에 빠질 거라는 걸 확신하게 했다.


 불편한 편의점을 읽는 내내 울고 웃었던 이유도 따뜻한 주인공에게 있었다. 독고가 온몸을 던져 영숙의 지갑을 지켜낸 순간 나는 예수를 떠올렸다. 떨어질 콩고물을 헤아려 볼 때 감당할 수 있는 정도는 전화를 걸고 기다려주는 것까지다. 다른 거지들에게 구타당하면서 지갑을 보호한다는 건 호의의 범주를 넘어선 행동이다. 그러나 독고는 그만한 일을 하고도 큰 사례를 원하지 않았다. 고작 도시락을 얻어먹은 게 전부였다. 이후에도 독고는 자신을 고용하려는 영숙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지도 더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걸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고 반성하는 것을 온전히 해내려고 힘쓰며 편의점 손님들을 일일이 지켜주었다. 삶에 허우적거리던 그들의 마음속 오물들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예수가 중풍 병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했더니 일어나 걸었던 것같이 대단한 기적은 아니지만, 독고는 '옥수수 수염차를 먹어라'라고 권하며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다시 꿈꾸게 했다. 

 독고가 마음을 치유했다면 영숙은 경제적 부양을 담당하고 있었다. 수익이 나지 않는 편의점을 악착같이 유지한 이유도 종업원들을 위한 배려였다. 무엇보다 노숙자 독고의 자립에 방아쇠를 당긴 건 영숙이었다. 사실 영숙은 소설 초입에 경계심에 가득 차 독고의 호의를 잔뜩 의심했었다. 다소 야발진 영숙을 재평가하게 된 건 야외 테이블 때문이었다. 영숙은 편의점 야외 테이블이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의 작은 안식처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나하나 설명하진 않았지만 영숙 또한 그곳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훔친 적이 있었으리라.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우는 사람의 마음에 공감할 수 없기에 영숙은 그들을 위하여 잦은 민원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테이블 놓기를 고집했다. 영숙은 묵묵히 모두를 돕고 있었다.

 독고와 영숙이 보고 싶다. 트렌드가 급격히 변하는 요즘, SNS와 미디어에서 앞다투어 자극적인 이야기와 영상을 공유하고 송출한다. 선한 사람은 호구라는 둥,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둥 공감을 많이 받는 사람의 생각이 정답인 양 공유되고 있다. 게시글과 조금 다른 의견이 댓글로 달리면 서로 헐뜯기 바쁘다. 아무리 봐도 저만치 공격적인 사람은 어딘가 상처투성이일 거 같아 안타깝기도 하지만 언짢은 건 어쩔 수 없다. 

 더 염려스러운 건 6학년 교실 풍경이 SNS 게시글과 닮아간다는 점이다. 학생들과 9시부터 15시까지 함께 있으면 그들에게서 불현 튀어나오는 SNS 식 도덕이 서로의 관계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자기 생각에만 몰두한 나머지 조그마한 다툼에도 ‘손절(절교한다는 표현)’하자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댄다. 불편함을 내색하는 도를 넘어섰다. 그럴 때마다 학생들을 조심히 불러 조곤조곤 설명해 준다. 불편한 사람과 상생하는 걸 배우려고 우리가 학교에 다니는 거라고. 일방적으로 희생할 순 없지만 친구가 나와 맞지 않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조금 더 고민해 보라고.

 서로 다툰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운했던 걸 털어놓는 자리를 마련한 적 있다. 그들은 자신의 희생과 양보를 늘어놓기 바빴다. 그러나 고학년 정도가 되면 이 순간에 무엇이 가장 멋있는지 알고 있다. 상대가 서운할 수 있음을 시인하고 사과하며 나의 의견을 정중하게 말하는 것. 사과받은 상대방도 선행된 양보에 감사를 표하고 경청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 이런 생산적인 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내가 해야 하는 질문이 있다.

 ‘네가 서운할 땐 어떤 말이 가장 듣고 싶니?’

 학생들은 금세 속뜻을 알아차리고 수줍게 대답하곤 사과를 건넨다. 우리가 본디 이렇게 멋있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독고와 영숙은 우리 마음속에 항상 존재했다.


 권선징악. 동화에나 나오는 꿈같은 얘기다. 그러나 오늘도 나의 고백은,

 “전 한 번도 선한 진심이 통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

 좋은 것만 기억에 남아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거절당하고 상처받고 배신당했던 기억들은 잘 배설된 건지, 세월이라는 시간에 뾰족하게 깨졌던 것들이 다 풍화되어 매끈해진 건지, 회상하면 다 추억이고 행복한 기억이다.

 독고와 영숙을 응원한다. 주인공들을 거쳐 간 인물들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지만 주인공 두 명만이 시원한 결말을 맺지 못했다. 처음에는 의아했으나 숙고해 보니 그들에게 정해진 결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독고와 영숙 자체가 이야기의 시작이고 결말인 것을. 그들은 어느 날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하루는 기대하지 못한 선물을 맞이하는 넉넉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곳곳에서 독고와 영숙을 자처하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한다. 우리를 호구라고 부르는 세상이 야속하게 느껴져도 눈이 머리 뒤에 달리지 않은 이상 우린 바라보는 쪽으로 걷게 되어 있다. 더 높은 이상을 향해 우직하게 걷고 있는 우리, 우리는 조금 더딜 수는 있으나 현재 우상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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