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원북원부산
편의점 야외 테이블은 확실히 동네의 쉼터이자 작은 여유가 있는 곳이다. 그녀가 수차례 민원과 직원들의 불평에도 이곳을 없애지 않은 이유였다.
-불편한 편의점-
배운 대로 되는 게 없었다. 흥부놀부, 장화홍련 같은 한국 고전뿐만 아니라 신데렐라, 백설공주 등 서양 고전에서도 짙게 깔리는 권선징악 개념은 어렸던 나에게 ‘살맛 나겠구나’하는 환상을 심어 주었다. 100세 시대에 30살이면 이제 막 30% 산 건데 뭘 알겠냐만 지금까지 느끼기엔 그렇다. 세상이 꼭 보응이라는 원리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선‧악만큼 구분하기 지난한 게 없었다. 사람의 허물을 그 자리에서 선과 악으로 나눌 만큼 신은 단순하지도 단호하지도 않았다. 흥부가 재산을 탕진했을지, 신데렐라가 권력에 눈이 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히려 세상이 배운 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고전이 꾸준히 사랑받는 걸 수도 있겠다. 어떻게 저런 게 인간이라고 돌아다니냐며 뉴스를 보고 혀를 끌끌 차도, 길거리에 내놓기가 불안해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원을 표표히 부유하는 게 현 세태라도, 고전이 여전히 읽히는 건 권선징악을 믿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정의, 희생, 사랑 같은 가치를 지향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따뜻한 사람이 좋다. 영화나 드라마, 도서도 마찬가지다. 옅은 미소를 짓게 하고 빨리 보거나 읽는 게 아깝기까지 한 것들은 보통 포근한 작품들이었다. 인종 차별을 아늑하지만 날카롭게 그린 영화 ‘더 헬프’, 박완서 씨의 다정함을 품은 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는 첫인상에 내가 이 작품과 사랑에 빠질 거라는 걸 확신하게 했다.
불편한 편의점을 읽는 내내 울고 웃었던 이유도 따뜻한 주인공에게 있었다. 독고가 온몸을 던져 영숙의 지갑을 지켜낸 순간 나는 예수를 떠올렸다. 떨어질 콩고물을 헤아려 볼 때 감당할 수 있는 정도는 전화를 걸고 기다려주는 것까지다. 다른 거지들에게 구타당하면서 지갑을 보호한다는 건 호의의 범주를 넘어선 행동이다. 그러나 독고는 그만한 일을 하고도 큰 사례를 원하지 않았다. 고작 도시락을 얻어먹은 게 전부였다. 이후에도 독고는 자신을 고용하려는 영숙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지도 더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걸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 고통스러운 과거를 떠올리고 반성하는 것을 온전히 해내려고 힘쓰며 편의점 손님들을 일일이 지켜주었다. 삶에 허우적거리던 그들의 마음속 오물들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예수가 중풍 병자에게 '네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 했더니 일어나 걸었던 것같이 대단한 기적은 아니지만, 독고는 '옥수수 수염차를 먹어라'라고 권하며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다시 꿈꾸게 했다.
독고가 마음을 치유했다면 영숙은 경제적 부양을 담당하고 있었다. 수익이 나지 않는 편의점을 악착같이 유지한 이유도 종업원들을 위한 배려였다. 무엇보다 노숙자 독고의 자립에 방아쇠를 당긴 건 영숙이었다. 사실 영숙은 소설 초입에 경계심에 가득 차 독고의 호의를 잔뜩 의심했었다. 다소 야발진 영숙을 재평가하게 된 건 야외 테이블 때문이었다. 영숙은 편의점 야외 테이블이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의 작은 안식처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영숙은 묵묵히 모두를 돕고 있었다.
권선징악. 동화에나 나오는 꿈같은 얘기다. 그러나 오늘도 나의 고백은,
“전 한 번도 선한 진심이 통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 본 적이 없습니다.”
좋은 것만 기억에 남아서 그런 걸 수도 있다. 거절당하고 상처받고 배신당했던 기억들은 잘 배설된 건지, 세월이라는 시간에 뾰족하게 깨졌던 것들이 다 풍화되어 매끈해진 건지, 회상하면 다 추억이고 행복한 기억이다.
곳곳에서 독고와 영숙을 자처하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한다. 우리를 호구라고 부르는 세상이 야속하게 느껴져도 눈이 머리 뒤에 달리지 않은 이상 우린 바라보는 쪽으로 걷게 되어 있다. 더 높은 이상을 향해 우직하게 걷고 있는 우리, 우리는 조금 더딜 수는 있으나 현재 우상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