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 주택

2022 원북원부산

by Gyu
오죽 자신이 없었으면 아파트에 산다는 걸로 자기를 확인하고 싶었겠어.
-순례 주택-

막 영국 워킹 홀리데이를 다녀오고 난 뒤였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 좀 다녀왔다고 그 출신이나 모습이 바뀐 거도 아닌데, 마치 런던 부촌에 집 한 채 있는 거처럼 으스댔다. 말끝마다 런던, 영국을 들먹이며 친구들을 진절머리 나게 했다. 내가 유럽 얘기를 꺼낼 때마다 친구들은 손가락을 접으며 '오늘 영국 얘기 벌써 3번째다'하며 재치 있게 말을 끊었다.

우습지만 영국 영어 뽕에 취해 별꼴을 다 보여주기도 했다. SNS에 글을 올릴 때 영어로 해시태그를 달았는데 스펠링도 잘 모르는 회화 표현은 일일이 구글로 검색했다. 사실 이건 별꼴 축에 속하지도 않았다. 한날은 공공장소에서 영어로 통화하는 척하기도 했다. 내 억지스러운 모놀로그를 들어야 했던 건 대게 카페에서 마주친 아주 잘나가 보이는 사람들, 주짓수 체육관을 나오며 마주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아주 우쭐거리며 말하긴 했다.


생각해 보면 그 순간들 속, 나는 [순례 주택]에 나오는 1군들처럼 좁은 곳에 서 있었다. 경매대에 정연히 솟아 꾼들의 날카로운 시선을 꿋꿋이 견디며 고개를 쳐들고 나의 가치를 뽐냈다. 한 편으로는 경매대에 올라간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지만 이왕 팔릴 거 비싸고 싶었다. 실제로 가치 있는 게 아니라 그냥 값만 비싸고 싶었다.

순례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고왔다.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그 속에서 치열하지만 행복을 잃지 않고 살아갔다. 자신의 위치, 직업, 재산, 능력같이 형용사나 목적어에 불가한 것들에 휘둘리지 않았다. 주어인 자신 그 자체를 사랑했다. 물론 그들의 과거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매일같이 격렬한 전쟁을 치렀을 날들의 연속이었을 터였다. 패할 때도 있었겠지만 승리하는 순간이 모래알처럼 많았겠지. 살아가며 크고 작은 내면의 다툼들이 있겠지만 줄곧 이겨 온 경험을 바탕으로 연패할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를 형용하는 건 나를 설명할 수 없다. 아직까지는 순례처럼 세상과 휴전 중에 있지는 않고, 내전을 이어가고 있지만 승리하는 날이 더 잦았으면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