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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May 16. 2022

모두 웃는 장례식

2022 원북원부산

도라지꽃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모두 웃는 장례식-

 황순원 씨의 대표작 '소나기'에서 도라지꽃이 가지는 의미가 있다. 학창 시절 그 보랏빛이 상징하는 게 죽음이라며 외웠던 기억이 있는데 그게 적잖이 인상 깊었나 보다. 어디서 도라지꽃을 보든 '소나기'의 소녀가 생각나는 지경이니 말이다. [모두 웃는 장례식]에서 할머니 한복에 핀 도라지꽃을 보면서도 '소나기' 생각이 났다. 어린이들의 순수한 감정이 어떠 형태로 채 피어나기 전에 져버려 나만 애달픈 걸까. 한국인이라면 가지고 있는 흔한 무조건적 사고 회로일까. 그들의 마지막 나들이가 떠오르는 날엔 괜히 먼 곳을 보며 사색에 잠긴다.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7살 때였다.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 병간호를 위해 어머니가 추풍령으로 가야 했다. 나와 누나는 멋도 모르고 귀성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새로운 환경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그런지 적응 과정에 대한 기억이 흐리멍덩하다. 할아버지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기억은 숨을 거두시기 몇 시간 전의 모습이다. 하얀 이불을 덮고 누워계신 할아버지가 나에게 손을 뻗으시며 내 손을 잡기를 원하셨다. 여기서부터 내 기억은 조작됐다.


 내가 기억하기로 나는 당시 너무 무서웠다. 엄하고 무표정하기만 하셨던지라 앓고 계셨지만 여전히 강한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손을 맞잡아드리지 못했다. 나이가 들며 막연하게 '젊음이 태생부터 가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나를 지배했었구나' 싶었다.


 내 기억은 위와 같은데 우연한 기회에 엄마와 말을 나누며 충격적인 사실을 들었다.

 "어린 게 뭘 알긴 아는 건지, 할아버지가 손을 뻗어 네 손을 잡았는데 네가 할아버지 옆에서 서럽게 울더라. 아주 오래."

 눈물 한 방울 흘려드리지 못한 게 후회로 남았었는데 진실을 알고 스스로가 대견했다. 젊음과 죽음에 대한 오해를 가지며 30년을 살았다는 게 밝혀지고 나니 죽음의 공포는 무슨 하며 코웃음을 쳤더랬다.


  생전 장례식.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소재인 건 분명하나 6학년 학생의 시선으로 바라보니 의미가 새로웠다. [모두 웃는 장례식]을 보며 '시선으로부터'가 생각난 건 엄숙해야 할 날이 가져야 할 무게는 여전하나, 환하게 깔리는 삶의 몸부림이 답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잘 죽는 것. 그건 잘 헤어짐처럼 역설적인 말이지만 누구나 원하는 마지막의 모습이다. 죽거나 헤어지고 난 뒤의 찌꺼기는 항상 남겨진 사람의 몫이나 그들이 덜 아팠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떠나는 자의 배려다. 할머니의 생전 장례식도 본인의 만족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49%는 남은 가족들을 배려한 것이었다. 떠나보내는 과정을 일찌감치 겪으며 그 대상을 만질 수 있고 그 대상과 얘기할 수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축복이 아니다.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 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일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박완서'


  조부모와 손녀의 관계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박완서 씨의 고백도 오버랩된다. 그 사랑의 크기와 무관하게 하찮다고 표현한 그녀의 겸손함이 귀하다. 이 세상 어딘가 그녀가 가졌던 시각을 가진 사람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건 세상에게 손해다. 나는 막 태어나진 않았으나 그녀의 시선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언젠가 생기게 될 나의 손자에게 손톱만큼의 책임도 느끼지 않으며 사랑만 가득 주는 날만 기다리는 중이다.


 아빠와 꼬물이(조카 태명)를 보고 있으면 짠하다. 어깨가 축 늘어진 아빠, 발랄하다 못해 감당할 수 없는, 결코 꼬물거림이 아닌 조카. 그 둘의 대비는 음과 양의 조화처럼 아름답다. 그래서 멋들어진 풍경을 보면 눈물이 나듯 짠하다. 그런데 꼭 산통을 깨는 게 아빠가 조카에게 요구하는 예의다. 조카는 아직 어려서 인사가 어색하다. 할아버지는 마냥 달려가서 안겨야 하고 애교를 부려 아이스크림을 얻어내야 하는 존재인데 아빠는 계속 인사를 바란다. 손녀가 손가락질받으며 자라지 않기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겠지만 속이 탄다. 꼬물이는 우리의 몫이 아닌데 책임을 느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모두 웃는 장례식]과 박완서 씨처럼 사랑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고희에 가까운 연세에 책임을 진다는 건 스스로에게도 너무 가혹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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