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 '가십걸'에서 나왔던 명대사다. '시크릿 가든'이라는 한국 드라마에서 오마주 되며 화제가 됐었더랬다. 그 대사를 입에 담았던 여주인공들은 실제로 미친 건 아니고 나름 인간미도 있어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소유했다.
조르바가 그랬다. 적잖이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언행이, 저 시대에 가능했을까 싶은데 그가 싫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조르바 같은 사람은 아니고 '보스' 같은 사람이라 조르바의 삶이 신기하기도 해서 그를 실증 낼 수 없었던 거 같다. 데미안 다음에 읽은 게 그리스인 조르바다 보니 묘하게 연결되는 재미도 있었다. 작품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지만 시대가 비슷했다는 점, 내면에서 솟아나는 삶을 사는 조르바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그랬다.
우리는 모두 죽어가고 있다. 조르바는 험난한 세상을 겪으며 그 사실을 깨달았고 조르바식으로 살기 시작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을 땐 춤으로, 몸으로 대화를 하고 사랑을 하고 떠나기도 했다. 특히 과부에 대해 원대한 비전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모든 행실이 '자유 전문가'처럼 보여 흥미로웠다.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과감하게 노출하는 뜨거운 사람이라 유쾌했다. 뭐든 하나에 제대로 꽂힌 사람, 즐기는 사람이 전문가가 될 수 있고 그 전문가를 볼 때 드는 경외심 비슷한 걸 조르바에게서 느꼈다.
조르바식으로 살고 싶지는 않지만 조르바처럼 살고 싶다. 방탕한 삶이 선망의 대상이 아니게 된 지는 꽤 오래다. 편협한 사고에 갇히는 거도 사양한다. 그저 내 속에서 솟아 나는 걸 두려움 없이 살아낼 수 있고 해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상처나 트라우마에 갇혀 스스로 방어하지 않고 폭풍 한가운데에 나를 내몰 수 있는 담대함이 부러웠다. 조르바는 자신의 철학을 온전히 신뢰했기에 그것들이 가능했으리라.
나는 '미친년'이고 싶지는 않고 '따뜻한년'이고 싶다. 억지로 따뜻한 거 말고 마음에 부담 없이, 내 손톱 발톱까지 그걸 원해서 자처하는 인간 난로. 그 과정이 녹록지 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면 가능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