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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Jan 08. 2023

폭풍의 언덕

그곳은 그가 십팔 년 전에 처음 손님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왔던 바로 그 방이었답니다.
-폭풍의 언덕-

 언제부턴가 막장 드라마에 큰 관심이 생기지 않았다. 사랑 이야기도 현실성이 없는 것 같아서 딱히. 생각해 보면 거의 모든 막장 드라마 속에서 극적으로 치닫는 계기가 사랑 때문이니 '멜로'는 막장일 수도.

 예전에는 멜로라면 환장했었는데 인상 깊게 봤던 작품도 돌려보면 시대착오적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다. 10여 년 전에 방영된 시크릿 가든이나 상속자들도 다시 보면 그렇게 폭력적일 수가 없다.

 '사랑'이 소비되는 것 자체가 불만스럽기도 하다. 당최 티브이만 틀면 연애 얘기뿐이니 현실에서도 연애하지 못하면 하자라도 있는 양 안쓰럽게 쳐다보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다. 왜 둘이 아니냐고 묻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혼자일 때도 충분히 즐겁다. 오히려 멋모르고 사랑했다가 데인 적이 더 많아서 사랑과 연애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콘텐츠들이 원망스러웠다. 이별 뒤에 어떤 트라우마가 찾아오는지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폭풍의 언덕을 읽으며 가장 놀랐던 건 영국에선 사촌끼리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작품이 절정을 지나는 찰나에 캐서린과 린튼, 캐서린과 헤어튼이 이어지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던 건 몇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동성동본이 금지된 문화 때문일 것이다.

 문화적 차이를 넘어 작품 속에서 히스클리프의 모난 사랑이 어떻게 사람과 가족과 관계를 넘어 본인까지 망가뜨리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사랑 이야기는 막장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엘렌이 서술하는 사건들이라 캐시의 진심이나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없지만, 엘렌을 전지적 작가로 여긴다면 나는 캐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보다 이해관계를 선택했다면 자신의 선택에 충실해야 한다. 실수라는 걸 깨달았다면 결과를 각오하고 이를 바로 잡아야 하고. 그러나 캐시는 사랑도 잃기 싫고 돈이나 명예도 잃고 싶지 않은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 모든 사건의 원흉이 됐다. 그거야 말로 불명예지 않은가.


 영미권 콘텐츠를 소비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극적이다. 감정의 묘사가 탁월하지만 작은 일에도 세상이 멸망할 거처럼 반응하는 모습이 좀 우습기도 하다. 현실에서 만나는 원어민 선생님들과는 또 딴판이라 적응이 안 되기도 하다.

 주인공들의 민감한 감정에 이입해 사건을 따라가다 보니 읽는 내내 감정 소모가 너무 컸던 것 같다. 그만큼 제대로 된 사랑 이야기이긴 한가보다. 이로써 몇 년 동안은 사랑 이야기, 영미권 소설은 충분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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