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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Jan 07. 2023

외딴 눈섬을 걸으며

 체크아웃 까진 넉넉하게 30분 남았지만 서둘러 방을 나섰다. 침이 마르고 눈을 뻑뻑하게 하는 건조함과 히터가 데워놓은 방에 겹겹이 옷을 껴입고 있자니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밤 사이에 눈이 좀 쌓였을까 기대하기도 했지만 도로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젯밤 살갗에 닿여 곧장 녹아버린 눈은 진눈깨비였나 보다. 나는 다행히 부산과 비슷한 서울 추위에 흡족해하며 무거운 가방을 걸머지고 녹아 사라져 가는 회색빛 살얼음을 조심히 밟아 길을 내려왔다.

 자못 일찍 나온 탓에 1시까지는 시간이 제법 있었다. 경복궁 역에서 오래된 친구를 만나기로 했으니 고궁 산책이나 즐길까 하여 지하에서 올라왔다. 웬걸, 사람이 걸어 다니는 주로에서 동떨어진 돌담 아래가 새하얬다.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혹시 궁궐 안에도 소복이 쌓이진 않았을까. 서둘러 티켓을 끊었다. 필요 이상으로 거창한 개찰구를 지나보이는 근정전 주변으로 예쁘게 한복을 차려입은 관광객들이 왁자지껄 사진을 찍고 있었고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었다. 나는 짐짓 점잖은 척을 해대며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눈이 녹지 않은 그곳으로 갔다. 사람이  다니지 않았던 , 볕이  들지 않은 처마 아래. 뽀드득.

 나는 문득 인적이 드문 곳에서 발바닥에 느껴지는 ‘뽀드득’의 감각을 소리로 듣고 싶어졌다. 잠을 설치기도 했고 어제부터 오래 걸은 탓에 조금 지치기도 했고. 사람이 입으로 내는 소리나 속에서 새는 소리에 귀기울기 힘겹기도 했다. 나는 웃음소리로부터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유독 귀가 쫑긋 세워지는 영어와 우르르 몰려다니는 꼴이 나를 사무치게 했다. 못이 꽝꽝 언 경회루를 넘어 향원정까지 가니 사람이 보이기는 하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경계를 풀고 새하얀 눈 위를 뽀드득 거리며 걸었다. 크로와상을 한입 베어물 때 느끼는 희열, 한 겹 한 겹 사이에 존재하는 공기층이 사라지며 예민한 이와 잇몸에 전해지는 그 쫄깃함이 느껴졌다.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 위를 걸을 때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촘촘한 밀도와 강직한 신음을 들으며,

 ‘걷고 싶다.’


 이제는 조금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방치해 두기도 했으니 기실 이건 내 탓이다. 벌써 1년이다. 헤어짐으로부터 나는 단 한순간도 자유할 수 없었다. 난 그 사람을 만나기 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으리라. 숱한 이별을 겪었고 승화는 언제나 냉화상을 남겼다. 처음에는 그 사람이 사는 곳으로는 시선도 두지 않았다. 그게 더 어색한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고 애써 외면하는 나를 의식하면서도 몸이 식고 심장이 빨리 뛰는 일은 그만둘 수 없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다들 말하길 충분히 아팠으니 유난은 그만 떨고 툭툭 털어버리라고 했으니까. 재채기처럼 ‘어, 저기 그 사람 살던 곳인데.’하고 내뱉는 날에는 지뢰라도 밟은 양 학을 떼며 싫어했으니까.

 나는 이별 앞에서 다들 손쉽게 하는 그 툭툭이 잘 안 됐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 때도 툭툭이 잘 안 돼 탈탈 하기도 하고 퍽퍽 하기도 해 봤지만 묻은 것도 잘 못 떼어내는 마당에 생긴 걸 쉽사리 할 수 있을 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사람이 사는 곳을 지나갈 수 있게 되고 쳐다볼 수 있게 됐지만 이전과 같았던 적은 없었다. 아프던 게 따가워지고, 따갑던 게 으리해지고, 으리으리한 게 조금 불편해지고, 간지럽다가 아마 곧 ‘맞아, 이 상처 그때 생긴 거지’하는 날도 오리라.


 나는 여행할 때 산책하는 걸 참 좋아했다.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답답하거나 우울할 땐 흐물흐물 거리며 딴딴한 한 발을 내딛는 걸 즐겼다. 이런 생각도 하고 저런 생각도 하다 결국엔 ‘바람이 참 좋네’, ‘우와 나무가 참 예쁘다’로 끝나고 마는 사색에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코로나 이후로 한참 여행을 못 가기도 했거니와 의식을 놓으려는 찰나마다 그 사람이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걷지 않았다. 그래서 올해가 유난히 힘들고 외로웠던 걸지도.

 다른 곳은 녹았는데 온기가 부족해서 녹지 않은 외딴 눈섬. 이제는 그 위를 걸을 때가 됐다. 이제야 봄이 오려나.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어 주기만 해도 좋을 거 같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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