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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Jan 09. 2023

행복하세요? 근데 그게 중요하긴 한가요?

 영국 워킹홀리데이에서 심심치 않게 들었던 게 YOLO였다.

한 번뿐인 인생, 모든 선택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우선 돼야 한다는 가치를 파는 슬로건이다.

그렇게 살아야 후회가 없다는 생각을 심어 준다.

가족, 사회로부터 일방적인 헌신을 강요받은 자들은 YOLO에 열광하며 자신에게 친절해지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나 또한 그랬고.

 

 임용 합격 후 군 입대를 앞두고 6개월 동안 모은 돈을 여름 방학 때 탕진하기로 결심했다.

YOLO의 일환이었다.

억압의 대명사격인 군대에 가기 전에 그와 정반대에 있는 나라, 자유롭기로 정평이  나라이며 YOLO 원조인 .

미국에 가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착해서  지하철에 떡하니 붙어 있는 포스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Do what you wanna do."

 미국 여행은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던 때보다 즐거웠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하고 싶은 일들만 하니 당연 짜릿한 일이 가득했다.

물론 동행했던 친구의  주사 때문에  마음 썩히기도 했지만.


 그러나 체질이라고 생각했던 YOLO는 오래가지 않았다.

성정이 원체 요란스럽지 않고 조심스러운 편이라 미래에 대한 걱정을 뒤로하고 매 순간 내 마음을 따르는 게 버거워진 건 군 입대 후부터다.

적응하지 않으면 도태 이상의 결과를 맛보는 장소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되려 시스템이 편해졌을 때 YOLO는 젊은이들이나 하는 거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보장되지 않은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군 제대 후 나는 곧장 보험을 가입했다.


 지루한 일상, 실상 100세 시대에 70년은 더 살아야 하는 진짜 세상은 생각보다 더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뭐든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나는 고작 사회 초년생이었다.

그렇다고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여러 의미로 다이내믹했을 뿐.

마카롱을 먹을 때 아메리카노를 시켜야 그 맛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쓴 맛 사회에서 간간이 일어나는 달달한 일들은 선택의 주권이 누구에게 있었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달달함 보다 극적인 맛을 냈을 뿐.


 학생들과 투닥거리는 게 너무 힘들었던 날에 마침 교사 평가가 종료 돼 이를 확인했을 때, 그때가 그랬다.

감사하다는 말, 올해 내가 담임이 돼서 너무 다행이라는 말.

그 몇 마디 넘지도 않는 짧은 문장은 진심이 담겼든 인사치레든 눈물을 글썽이게 만들었다.

매번 억지로 하는 출근이 감사해지는 맛이었다.


 YOLO에 열광하던 나는 하고 싶은 것을 해야만 행복할 거라 착각했지만 기실 행복은 정말 가까이 있었다.

행복이라는 게 근처에 있다며 매사에 감사하다 보면 삶이 풍성해진다는데 그 말에 충분히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어떤 날에는 행복에 대한 그런 뻔하고 상투적인 정의가 사뭇 보잘것없기도 하다.

행복도 결국 감각의 일종이라 익숙해지다 보면 만족스럽지 않은 날이 생긴다.

이런저런 고민이 겹치기라도 하면 왜 나만 갖은 애를 쓰며 사는 것 같은지 대뜸 골이 난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 중 참척이 제일이라는데 그걸 겪었던 박완서 씨가 썼던 에세이에 이런 말이 있다.

왜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한참을 끙끙대고 있으니 한 수녀가 와선 ‘왜 당신에겐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죠?’하고 반문했단다.

맞는 말이다.

내게 그 난리가 피해 가야 하는 당위성이 없긴 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살아 있는 건 자연스러워야 하니까.

자연스럽다는 건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는 거니까.


 자연스럽게 생기는 우리의 모든 감각과 감정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모든 사건들도 구구절절한 이유가 필요 없다.

행복한 일도, 불행한 일도 ‘그냥’ 생기는 거다. 나의 경우 하나님의 계획인 거다.


 YOLO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하고,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며 그것만이 행복한 길이라는 오개념을 주입할 수 있다.

YOLO하는 삶은 한없이 행복할까? 그럴 리가.

반대로 그렇지 않은 삶은 영원히 불행할까? 절대로.


 내가 살아가는 동안 내릴 장고 끝의 선택에서 ‘나의 바람’이나 ‘행복’이라는 지표가 때로는 덧없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나는 어떤 길을 가든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할 건데 왜 꼭 내 선택만을 고집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남의 말에 무조건 따르라는 것도 아니다.

이제는 조금 더 다양한 관점에서, 예를 들면 타인이나 사회가 지키는 절대선이나 전능자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에 다시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시점이 당도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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