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동안 찾아 헤매던 행복을 이제야 마주쳤다. 쓰는 행위도 마음 안에 재료가 쌓여야 하는데 인지하지 못했던 사이 행복이 충일한 바람에 지껄여야 속이 시원할 지경에 이르렀다. 십일조를 뽑으러 ATM기로 향하는 밤거리, 강풍이 나무를 흔드는 풍경을 지나치며 야밤에 뜬 구름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그러나 역시 내일 아침에라도 이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기쁘게 하나님을 맞이하리라.
돈이나 행복 명예나 권력같이 우리가 좇는 허상은 사 월의 벚꽃잎처럼 손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기를 쓰고 잡으려면 못 잡을 거야 없지만 벚꽃잎을 잡는 확실한 방법은 그즈음에 손바닥을 오므려 스스로 떨어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행복을 마주한 경위도 그랬다.
사람이 버린 담배꽁초에서 시작하거나, 농가에서 소각하던 불에서 옮겨 붙은 산불 소식에 한참 걱정스러웠다. 비가 많이 내렸던 날이었던가. 산불이 좀 진압 됐겠거니 싶었고 자리에 누웠는데 불현 창밖이 보고 싶었다. 안개가 짙어 바로 앞 동이 보이지 않는, 어딘가 인생을 닮은 구석이 있어 한참 넋을 놓았다.
런던에서 티를 마시게 됐을 때 뜨거운 물에 우린 맑은 티보다 우유를 몇 방울 떨어뜨린 밀크티를 좋아했다. 설탕은 기호에 맞게 넣어야 했고 나는 넣지 않은 게 티 본연의 맛을 느끼기 좋아 더 선호했다. 그렇다면 우유도 넣지 않아야 옳으나 투명한 티에 우유를 몇 방울 넣으면 하얀 연기가 퍼져나가는 모습이 황홀했다.
런던에서, 컵 안에서나 마주하던 연기가 샤시 밖으로 깔려 있었고 나는 밤 한가운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효과를 목격하고 있었다. 밤하늘에 우유를 탄다면 어떤 맛일까. 조금 과하게 우린 티는 쓴 맛이 받쳐 먹기 거북할 때가 있는데 내가 여태 맞이했던 우울한 밤이 장구했다면 그날은 밤을 삼키기에 가장 적절한 날이었다. 누가 탔는지는 모르겠으나 안개 몇 방울에 우울한 맛이 가셨다.
부연 안개 넘어 황색 신호등이 명멸하고 있었다. 대기 중의 과도한 물 분자 덕에 그 주황빛이 어느 방향으로 뻗어나가는지 경로를 볼 수 있었다. 덧붙여 항시 켜져 있던 가로등의 백색 불빛도. 생각보다 적은 부분이었다.
불빛들이 모여 밤거리를 밝혔고 광공해로 별을 잃었던 인류였지만 기실 밤거리를 밝히던 건 인공의 빛도 별도 아니라 달이었다. 인간이 만들어 낸 불빛들이 몇 억 년 전에 전달된 별빛이야 내쫓을 수 있었을지언정 달과 비길 수는 없었다. 경쟁하듯 시작한 사업은 아니었을 테지만 어두움을 좀 밝혀 보려고 만들어진 사물이 조명이니 그들의 역할은 그랬다. 밤을 밝히는 것. 그러나 조명은 태양은 하물며 달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저 한 가닥, 빛의 실타래들이 애처로웠다. 미워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나를 바라본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내가 비출 수 있는 한계는 명확했다. 그걸 인정하는 게 어려웠지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했다. 어느 위치에 설치되는지에 따라 더 넓은 곳을 으슥하게 비출 수도, 좁은 곳을 환하게 비출 수도 있었다. 어디에 있든지, 불이 켜져 있든 꺼져 있든 그저 그 자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기특한, 든든한 가로등. 우두커니 서 있는 가로등을 보며 슬쩍 웃음을 지었듯 하나님도 나를 보며 웃으셨겠지.
조금 더 뒤로 돌아가보면, 그래. 시합이 있던 날, 무릎인대가 잔뜩 부어 아직도 풀지 못한 깁스를 착용한 날부터 시작이었다.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이 출발선이었다. 패배감에 젖는 일과 무엇이 다르냐 하면 의지의 차이가 아닐까. 나는 하나님이 이미 정한 길 위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으나 최선을 다해 느끼는 게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첫째 임무라고 본다.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으면서도 토라져도 보고 발악하기도 하고 눈물을 쏟기도, 기도하기도, 감사를 전하기도 하는 게 어찌 됐든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 달가량 쌓여 산적한 행복이 발산됐다. 정말 오래간만이다. 슬픔이나 분노가 아니라 행복이었던 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