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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Jun 20. 2023

초등 3학년 공화국, 대한민국

 어느 순간 세상과 연결됐다는 사실이 피곤한 과업처럼 느껴졌다. 내 삶을 전시하고 타인의 삶을 관람하는 무한 스크롤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적인 선택이 필요했다. 연락이 잘 닿지 않는 지인들과 소통 창구의 역할을 하던 인스타그램을 삭제하는 것. 비장한 결단에 비해 어플 삭제는 얼마 걸리지도 않는 초라한 일이어서 내심 의구심이 들었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하고.

 사람이 언제나 건강할 수는 없었고 마음이 아플 때 SNS는 그야말로 독이었다. 자꾸 남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고 비슷한 내용의 콘텐츠를 소비하게 되니 삶에 만족이 사라졌다. 다행히 극적인 처방은 나를 탈연결하게 했고 탈우울하게 만들었다. 애당초 초연결을 원하지도 않았는데 부지불식간에 잠식당한 내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물리적으로 가까운 가족, 친구, 직장 동료와의 심리적 거리 두기를 주장하면서도 세상과 연결되는 데엔 열심이었다니. 일관성이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등교 정책이 자주 바뀌었던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도 문자를 발송했고 학생들에게 안내도 했으며 가정통신문도 나가는 내용이었지만 꼭 뒷북을 치는 보호자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체육관을 나선 뒤 버스를 타고 귀가하다 그 보호자의 전화 세례를 확인했다. 서너 통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깜짝 놀라 전화했더니 요지는 코로나 확진으로 등교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냐는 질문이었다. 오후 9시에 급하게 연락이 와선 묻는다는 게 출석이라니. 참을성을 발휘해 다음 날 아침에 물어도 늦지 않는 내용이었다. 개근의 의미가 무색해져 개근을 행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인은 퇴근 후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따지지만 교사는 논외라 생각했는지, 내 자식이 너무 소중했는지 모를 일이다. 규칙을 적용하는데 일관성이 없는 보호자의 태도가 츱츱하다. 아니면 '비상 연락망'이라는 말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내 탓일 수도.

 나는 되고 너는 안 되는 일관성의 부재가 충일하기로는 초등학교 교실만 한 곳이 있겠냐만은 배워야 하는 시기니 웃으며 가르칠 수 있다. 그러나 교사의 교육이 휘발되고 막무가내 인간의 재생산이 반복되는 걸 목격하면 힘이 빠진다. 학교와 가정에서 일관된 가치를 가르치지 못하는데 일관성을 배우길 원하는 게 무리일 수도 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사정을 들어보면 누구 하나 잘하기만 한 아이는 없는데 버릇없는 학생의 보호자를 보면 꼭 학교 교육에 딴지를 건다. 교사는 보호자의 말에 긍정해 주는 게 여러모로 피곤하지 않은 터라 어이가 없어도 똥이 더러워 피한다는 핑계로 눈을 살며시 감고 만다. 안 보는 척, 안 듣는 척하고 있어도 아이는 알고 있다. 자신의 보호자가 교사보다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기고만장한 아이에게는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 아이만 착하고 남의 아이는 나쁜 보호자의 막무가내식 민원을 듣고 있으면 딱 초등 3학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악성 민원 문제가 불거진 시기를 짐작하건대 그건 아마 우리의 잘못은 아닐 거라는 식의 노래도 나오고 책도 나오는, 위로가 판치는 순간부터였다. 현대 사회는 살아가기 힘겹다. 경제적 부담은 말로 할 필요도 없고 사회적, 문화적 책임을 다해야 하는 현대인은 지쳤다. 그래서 위로가 필요했던 건 알겠는데 도가 지나쳤다. 뭐든 내 잘못이 아니게 된 판국이니 내 아이가 잘못된 것도 남 탓을 할 수밖에. 모든 문제의 원인이 타인에게 있으니 내가 하는 말이 정답이기도 하거니와 알고리즘이 확산시키는 확증 편향의 문제까지. 포스트 모더니즘도 보완할 점이 많아 보인다.

 나 어릴 땐 1+1이 창문이라는 터무니없는 유머가 유행했었다. 오사마빈라덴에 후라이 똥 튀김 같은 가사가 나오는 노래가 유행가였다. 그때야 아닌 건 아니었던 때라서 선생님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고 부모님에게 이를 수도 없었다. 근데 지금은 아니라고 한 소리 했다간 왜 우리 애 기를 죽이냐며 민원 전화가 들어오기 일쑤다.

 동기 교실에서 오늘 있었던 일이다. 반에서 도난 사건이 있었는데 자신이 할 수 있었던 대처는 고작 욕구 조절에 관한 연설이었단다. 나 범인이요 하는 학생이 있었음에도 추궁하지 못했다고 했다. 반 전체를 대상으로, 큰소리 없이 국어책 읽는 어조로,

 "욕구가 생길 수 있지만 도덕적으로 판단해 올바른 일인지 판가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학교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각종 공기관, 사기업, SNS 가리지 않고 '나만 옳아'식 빌런이 동분서주하고 있다. 어떤 안건에 대한 옳고 그름을 떠나 죽여야 한다느니 역겹다느니 하는 폭력적인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확실히 어딘가 병적이다. 바야흐로 초등 3학년 대한민국 공화국이 도래한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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