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마나 많은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행동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고 질문하고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나 또한 그 수많은 나 가운데 하나의 나에 불과할 뿐이다.
-생의 이면-
수많은 모습 중 진짜 나는 누구일까. 다양한 페르소나 중 어느 것 하나 내게 해당하지 않는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었다. 가면을 벗고 나면 보기 싫을 정도로 일그러진 내가 있을 것만 같아 피로할 때였다. 그러다 우연치 않은 계기로 깊숙한 내면에 칩거하던 나를 발견했다. 그때부터 한동안 그게 나라고 착각했다. 사연, 눈물, 회의, 드라마처럼 무거운 단어가 가지는 매력에 잔뜩 취해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내 우울은 하나의 공연이었다. 남에게 감춰 왔던 상처를 보란 듯이 전시한 뒤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역할의 주인공, 나. 나는 그 공연을 선보이며 주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어떤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위악과 비약을 일삼던 그 모습을 내가 가장 매력적으로 느꼈다. 다양한 페르소나 중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나는 내 안에 있는 작은 소년을 인정하고 인지했다. 이제 사랑해야 할 일이 남았다. 어린 시절에 겪었던 결핍으로 인해 자라지 못한 작은 아이를 사랑해 나가는 게 성인이 된 뒤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호밀밭의 파수꾼,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세 작품은 방황하는 영혼을 가진 소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생의 이면'도 맥락을 같이 하고 있지 않나 생각했다. 우리는 왜 이 소년들이 가지는 삶에 대한 태도에 그토록 열광했을지 숙고한다. 아마 모두의 마음속에 이 소년이 한 명 정도 살고 있지 않을까 추측한다. 내 결핍에 집중하며 그 부족함을 채우려 방황하는 작은 소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 소년은 개인이 다양한 만큼 제각각 특별하다. 냉소적인 호밀밭의 소년, 회의적인 수레바퀴 소년, 폭발적인 데미안 그리고 사랑받지 못한 '생의 이면' 속 소년.
소설은 크게 교회에서 여인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뉜다. 개인적으로 흡입력 있었던 건 전반부였다. 소년이 자신의 상실과 외로움을 떨쳐내고자 방화를 저지르는 부분, 어둠에 잠식된 채 그 어둠을 사랑해 버리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그러다 자신과 똑 닮은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대목에서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작품 내 작가가 거론했듯 갑작스러웠다. 그렇지만 그 갑작스러움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무신론자가 신을 만난다면 소년처럼 사랑에 빠지리라.
의대가 대한민국 대학 순위 최상위를 차지하는 현실, 수능을 위해 목숨을 거는 학부모와 학생, 새삼스럽지만 내가 어렸을 때부터 산재했던 한국의 과제였다. 강산이 변하는 10년이 넘는 세월 속에 다른 이슈가 등장했지만 학업에 대한 이야기는 변하지 않았다. 아마 위에서는 바꿀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의아하게도 그런 세태 속에서 교육에 대한 인식은 또 바뀌었다. 단순히 잘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게 됐다. 완벽함, 육각형 인간이 화두가 된 건 그런 태도 변화의 연장선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사교육비, 우리 아이는 몽클레어를 입혀야 하는 사치, 친구와 가벼운 말다툼도 없었으면 싶은 환상. 결핍 없이 키우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그 눈물에 찬물을 좀 끼얹자면 내가 느끼기에 결핍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가가 사라진 초등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은 몸을 베베 꼬우며 학원 숙제로 힘드니 교실에서만큼은 제발 놀기를 원한다, 아이한테 명품을 입혀 봤자 태도가 명품이 아니면 미워 보이기 마련이다, 싸우지 않고 큰 사람이 어디 있던가. 혹은 이런 상상도 가능하다. 결핍이 없다면 내 삶이 이렇게 다채로웠을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결국 상대적이다. 슬픔이 있어야 기쁨이 있다는 걸 학부모는 알고 있지만 왜 자기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을까.
결핍은 성장에 필수적이다. 물론 고통스럽다. 그 불가피한 고통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지, 그 속에서 무엇을 가르칠지 판단하고 이끌어 주는 게 부모 역할이다. 하지만 똑바로 선 부모는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런 부모가 없었기에 호밀밭의 파수꾼도 수레바퀴 소년도 데미안도 생의 이면도 탄생할 수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