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성적 비관과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놓고 씨름했다. 어릴 때는 도움을 구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것이 친구든 교사든 어른이든 붙잡고 끈질기게 토로했다. 그러다 환원해 다시 살아갔다. 내가 던졌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그 질문은 여전히 내 속에 남아 나를 자꾸 아래로 아래로 잡아당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종종 그 수렁에 빠진다. 살아야 하는 이유, 애쓰는 목적도 없이 그저 누군가 달리니 같이 달리고 있을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제는 누구에게 도와달라 하지 않는다. 누구도 바뀌지 않았으나 신뢰할 만한 공동체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아마 내가 변한 탓이 클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맞이한 슬럼프를 스탠퍼드 대학 초대 학장(데이비드) 일화를 통해 극복하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평생을 바쳐 연구했던 물고기 표본이 지진으로 풍비박산 났을 때, 물고기 이름표를 물고기 비늘에 직접 바느질했다. 어쩌면 그의 인생이 통째로 날아간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저앉지 않았고 주인공은 그에 대해 깊이 탐구하기 시작한다.
데이비드는 연구할수록 수상한 인물이었다. 인생 후반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인을 불사했다. 우생학에 경도돼 불임 수술에 찬성하기도 했다. 다시 실의에 빠진 주인공은 데이비드의 발자취를 끝까지 쫓았다. 주인공 앞에 나타난 것은 두 가지 진실이었다. 우생학 피해자였던 소녀들은 서로 힘을 합쳐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데이비드가 평생을 바쳐 일궜던 물고기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다. 이로써 주인공은 아무 의미 없는 세상이지만 인간은 우리이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심금을 울렸던 광고가 있다. 그 광고 속 '같이의 가치'라는 글귀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함께라는 단어가 가지던 의미는 퇴색된 지 오래다. 수직적 공동체, 인간답지 않은 인간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던 평범한 사람들은 모두 지쳐버렸다. 이제 개인은 대한민국이 수호하던 옛 가치를 따르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곤 한다. 대한민국도 그 나라에 살고 있는 국민도 어딘가 지치고 쓸쓸해 보인다. 슬럼프에 빠진 탓이다.
슬럼프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유구한 역사 동안 한반도에는 전쟁과 기아 독재가 가득했다. 한반도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노예와 평민과 국민 또한 어김없이 함께했다. 역사를 기리며 2024년을 마무리하는 지금을 살펴봐야 한다. 빠르게 변하는 개인과 사회, 낡아버린 법과 도덕, 해체되는 우리. 대한민국이 함께 겪는 슬럼프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휘청하는 와중에도 꼭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일수록 우린 더 소통해야 한다. 답답해서 미쳐버린 혹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의 개인이 천방지축으로 '같이의 가치'를 망치게 둬선 안 된다. 온고지신하는 마음으로, 성숙한 자세로 모여서 듣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또 한 번 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