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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배신

by Gyu Dec 30. 2024
나는 단순히 공감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더 광범위한 의제가 있다. 나는 일상에서 이성적이고 신중한 추론의 가치를 옹호하고자 한다.
-공감의 배신-


 얼마 전까지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궜던 디저트는 밤티라미수다. 그전에는 요아정이 있었고 더 이전에는 탕후루, 크룽지, 크루키 등 수많은 디저트 흥망성쇠 역사가 유구하다. 그런 와중에 SNS에 이런 게시글이 있었다. '끝까지 가는 대한민국'이란 제목이었는데 별의별 마카롱, 크로플이 등장하는 현상을 재미있게 분석했다. 마카롱이나 크루아상 본고장에서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기상천외한 디저트가 등장하는데 뚱카롱이나 크룽지는 대한민국이 원조라고 해도 될 정도다.

 이런 현상이 비단 음식에서만 나타나진 않는다. 에버랜드 사파리에 있던 판다에 열광하며 팬덤이 등장하고 기사도 즐비했다. 판다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그러다 판다가 한국을 떠나는 날이 왔다. 비가 내리지만 우산 쓴 인파가 판다를 마중 했다. 눈물을 훔치는 사람도 있었고 판다가 탑승한 트럭을 붙잡고 오열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기사로 그들을 접하며 정말 그 사랑이 끝까지 갔다고 느꼈다.

 과유불급,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면 없는 것만 못하다. 어느 정부에서 청렴을 슬로건으로 걸었다. 공직자가 사사로이 자기 권력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다양한 법안이 통과됐다. 몇 년 뒤, 정부는 청렴이 가지는 의미를 거시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다. 친절도 청렴이란다. 공직 가장 말단에서 근무하는 나는 답답할 수밖에 없다. 헛소리를 해대는 악성 민원 학부모에게 공감해야 하는 게 청렴이라니.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지 싶었다.


 '공감의 배신'은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도덕철학, 심리학 등 사회학 분야에서는 최우선시되는 게 감정이다.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도덕성과 사회화를 결정한다고 본다. 그러나 저자는 공감이 과대평가 됐으며 인간에게 공감보다 중요한 건 이성적 추론에 따른 도덕성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다양한 실험과 학자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공고히 한다. 설득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생각에 이르게 되는데 책을 덮으며 저자에게 수긍하게 됐다.


 학부모에게 전화를 받을 때면 늘 하는 생각이 있다.

 '나는 감정 쓰레기통인가?'

 본인 자녀가 학교에서 친구와 다퉜다. 집에서 굉장히 우울해하며 밥을 거르거나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전화를 해 얘기를 전한다. 나는 여기서 대화가 끝났으면 싶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겠다고 교사가 대꾸했으면 전화를 끊었으면 좋겠다(알아보면 대부분 아무 일 아니다. 또 그런 문제가 생겼다면 본인 스스로 해결해 보는 것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어김없이 학부모는 자신의 감정을 덧붙이거나 본인 자녀를 과하게 변호하거나 상대 학생을 폄하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말은 제발 본인 친구나 배우자에게 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런 행태가 청렴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청렴은 친절로 확장되다 민원인이 마치 절대적 약자인 것처럼 공감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도를 넘어선 공감은 악성 민원도 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감은 정말 지켜져야 하는 도덕, 질서 그리고 대한민국이 애써 쌓은 사회적 규범을 무너뜨렸다.

 'T발 C야?'라는 말에 어떤 사람이 '왜 공감하지 못하는 T에게는 아무도 공감하지 못하나요?'라고 반문한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공감은 스포트라이트다. 스포트라이트는 그 조명을 받는 사람만 보게 만든다. 그 주변에 어떤 사람이 피해를 받는지 관심 없다. T에게는 악의가 없다. F에게 한 말은 T식 위로고 T식 공감이다. T발 C냐고 묻는 물음에 T는 어리둥절하다. F에게 과도한 스포트라이트가 가 있는 탓이다. 어쩌면 우리는 '공감'이라는 방패를 앞세워 폭력을 행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되돌아 봐야 할 때다. 이 책이 그 과정을 한결 논리적으로 만들어줄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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