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금요일 그리고 침묵의 토요일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셨다던 7개의 말을 '가상칠언'이라 부른다. 그중 요한복음 19장 30절에는 신 포도주를 마신 후에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예수가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다 이루었다."
τετέλεσται
태초의 말씀 곧 로고스가 만물을 지음으로 그가 없이 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 요한복음의 시작을 알린다. 창세기에는 혼돈과 공허 속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창세설화가 나온다. 이 구절은 고대 근동 세계에 선포된 신앙고백으로서 여타 신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창조론과 인간이해가 나온다. 창조는 질서였으며, 질서는 생명이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창조행위의 끝은 신의 안식으로 맺어진다. 이로써 안식은 신적 명령이 되었으며, 모든 노예 된 자들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쉼을 이야기하게 된다. 안식은 거룩한 것으로써 모든 일의 끝에서 진정한 완성을 이야기했다.
부활에 대한 전승은 이러하다. 유월절 곧 명절의 안식일 전날 오늘날 금요일이라 부르는 그날에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한다. 이는 예수를 적대하던 이들이 고도의 정치적 전략을 발휘한 것인데, 안식일에는 죽일 수 없으므로 명절 곧 사람들이 모여 북적대던 예루살렘의 거리에 십자가를 진 예수를 걸어가게 함으로써 성읍에 있는 이들로 하여금 그를 '실패한 메시아'로 보이게 하였다.
나무에 달린 것은 부정한 것이라 믿었던 유대인들은 로마에 반역한 죄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들 역시 비슷하게 이해했다. 다시 말해 종려주일에 말하던 호산나의 열광을 단번에 잠재울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나무에 달아 죽이는 것이었다. 예수를 사로잡고 재판하는 과정이 하룻밤만에 이뤄진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유월절은 어린양을 잡아 죽이기에 가장 적기였기 때문이다.
고난주간의 마침에 찾아오는 토요일은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일을 '다 이루신 후에' 세상에 찾아온 잠시간의 안식이었다. 그날은 침묵이었고, 예수를 따르던 누군가에게는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다. 세상은 폐허처럼 혼돈했다. 심연 위에 어둠이 있던 그 속에 말씀이 있었으니 세상에 빛이 있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9-10)
안식일이 지나 아침에 이르러 예수의 무덤을 찾아온 이들은 돌이 옮겨진 빈 무덤을 보았다. 이 날은 창조의 첫날이며,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신 그날이었다. 그리고 이 날을 매주 작은 부활절로 여겨 모이는 이들이 생겨나니 세상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하였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었으니, 이스라엘 안에 들어감으로 얻는 여호와의 백성 됨과 할례의 의식은 이내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 얻는 구원이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ὥστε εἴ τις ἐν Χριστῷ, καινὴ κτίσις· τὰ ἀρχαῖα παρῆλθεν, ἰδοὺ γέγονεν καινά. (고후 5:17)"
바울이 말한 '새로운 피조물' 곧 'καινὴ κτίσις'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이 만물과 새롭게 관계를 맺으며, 이로써 그의 세상은 새로운 세계가 됨을 함의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고대의 여호와 신앙이 세계의 이해를 새롭게 하였듯 이전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세상을 대하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공의' 가운데 비신화화된 만물과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안식을 얻은 인간이 있게 한다. 인간은 동산에서 그곳을 지키고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것이 이들이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이었으니, 오늘날 교회는 '사랑'으로 세상을 지키고 보호하며, 모든 이웃과 관계를 만들어 나갈 것을 계명으로 받든다.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던 제국에 대한 반역의 상징을 그들의 영광의 표징으로 사용한다. 인격을 산술적 가치로 환산하려는 시대의 모든 사조와 철학 그리고 문화와 가치관에 대하여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지배질서를 이야기하니 이것이 '하늘의 나라' 혹은 '하나님의 나라' 곧 예수로 말미암아 전해진 천국이다. 그로 말미암아 새롭게 된 창조물은 그들에게 안식을 준 공의로운 신의 지배질서에 편입된다. 예수를 믿음은 단순히 죄가 속해지고 내세의 영생을 누리는 것에 축소되는 개념이 아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함은 그의 다스림의 논리로 살며, 그의 다스림에 반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저항하고 싸워 마땅히 이웃과 세상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을 포함한다.
구원의 포괄성은 공동체의 다양성을 넘어 인간의 힘으로는 닿을 수 없는 거룩한 사랑이란 도달점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보여주며, 사랑이 떠오르게 하는 것이 주의 사랑을 계명으로 두는 공동체의 소명이자, 예수의 제자도를 받드는 모든 이들의 지상명령이다. 태초에 대한 이해가 그렇듯, 예수의 성육신에 대한 이해가 그렇듯, 혼돈이 만연한 천지 속에 빛이 되어감이 곧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되어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말하는 구절에는 "그들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를 말이 따라붙는다. 자신을 보이기 위한 외식적 선행이 아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선을 행하는 것이 이들이 오늘날 세상에서 빛을 비추는 방식이다. 태초에 빛이 있었고, 참 빛이 세상에 찾아왔듯,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셔야 할 일을 세상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창조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며,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예수는 그의 십자가를 감당함으로 그의 공생애 사역을 다 이루었다. 그를 따르는 교회는 오늘날 십자가를 감당함으로 그들의 일을 일을 이뤄가야 한다. 예수가 찾아간 이들을 기억하며, 오늘날 예수가 찾아가야 할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종교인이 멸시하고, 세속의 가치관이 경시하던 이들은 가난했고, 병들었고, 힘이 없고, 미천했고, 장애가 있었고, 때로는 비도덕적이었으며, 때로는 나약했다. 예수의 죽음에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으나 여전히 성전을 세워 세상으로부터 유리되어 예배를 드리려는 이기적인 종교성이 우리 가운데 산재하고 만재해있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교회가 오늘날 던져야 할 질문은 여기에 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는 어디를 향해 있었는지. 교회가 향할 곳은 성전이 아닌 세상이다. 예수의 공생애가 교회를 통해 재현되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리는 것은 좋으나 예전이 전부가 된 시점에서 교회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를 잊은 채 그들만의 명절을 지키는 파렴치한 이들이 되고 말 것이다.
신의 부재가 느껴질 듯한 아픔과 재난 속에 교회의 고난이 있어야 한다. 그곳에 교회의 영광이 있어야 하며, 교회의 기쁨이 있어야 한다. 교회가 향할 안식과 다시 찾아오며 선포될 빛은 사랑으로 찾아가 마땅히 짊어질 그들의 멍에로써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사랑하자, 힘써 사랑하자. 이 안식을 지나 또다시 혼돈이 가득한 세상에 빛을 전하자. 세상의 아름다움과 이웃의 존귀함을 우리의 삶으로 증거 하자.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 핏값으로 사신 형제와 자매들이다. 우리 하나님의 가치를 우리가 폄훼해선 안된다. 우리가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