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규의 글쓰기 교실
넓고 광활한 세계에서 한 가지 자유로운 것이 있다면 '과연 바람과 같다'라고 함은 적절한 말이다. 사랑하는 법이 도무지 서툰 인간에게 바람은 자유로워지라 말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자유롭게 하라 말한다. 진리와 자유가 신적 약속이듯 인격이라 부르는 우리의 마음은 확고한 것과 예측하지 못하는 것을 동시에 추구한다. 이 두 가지는 심리를 매료하는 거대한 법칙이며, 사람을 다채롭게 만드는 모순이자 그 마음에 깊이를 더하는 역설이다.
계속해서 막연한 말을 늘어놓는 이 프로젝트를 보며 그대는 어떤 생각을 떠올릴까? 아무래도 글을 쓰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에 창을 내리는 손을 움직일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술적인 증진이 아닌 작문을 하게 만드는 철학적 기반을 고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람의 자유로움에 상처를 입는다면, 나는 바람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걸까? 바람의 홀연함에 애써 외로움을 감추지 못한다면, 나는 바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까? 그렇지 않다. 이는 오롯이 나의 마음인 까닭에 옳고 그름을 논하기에 앞서 그저 자신의 솔직한 내면이라 말하면 된다. 그렇다 하여 호젓하게 한 가지 사고를 가지고 모든 바람을 대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모두에게는 저마다에게 불어온 바람이 있기 때문에 그와 내가 같은 마음으로 바람을 말하려는 것은 또한 건전하다 말할 수 없다. 바람을 바람이라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그저 바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이것과 그대가 말하는 저것이 같은 대상을 지칭하더라도 이를 이해하는 마음의 작동은 같은 필요가 하나도 없다. 다름을 통해 사람이 소통하니, 이 다름을 특별하다 말하고, 그 특별함을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글'이다. 이때에 말하는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은 바람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바람을 말하되 이것이 바람의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는 자세다. 바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바람의 전부에 미치지 못한다. 아직 내가 그것과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여서 그렇다.
순식간에 사라질 저 바람을 오랫동안 곱씹으려면, 가장 거친 흐름의 한가운데를 지나야 한다. 내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바람을 맞아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바람 자체를 거스르며 이에 맞서야 하고, 어느 순간에 와서는 바람에 떠밀리며 바람의 나를 재촉하는 일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결국 나와 바람은 멀어질 것이고, 서로의 방향과 길은 완전히 달라질 예정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 하여 운명을 비관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아직 그날이 오지 않았고, 지금 나는 바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면, 바람은 내게 의미를 가진 한 가지 대상이 된다. 나는 지금 바람과의 관계를 만들었고, 내 마음은 지나쳐버친 그것을 오랫동안 삼키지 못하고 있게 된다. 단맛이 다 스며 나오고 형체도 찾아보지 못할 만큼 내가 되새김하고 있다면, 이윽고 바람은 나를 구성하는 일부로 흡수된다. 비로소 나는 바람을 품었다. 내가 바람과 하나가 될 수 없지만, 바람은 나를 만들었다. 여기까지 바람을 곱씹었다면, 이제 바람에 대한 글을 쓰는 게 거칠 것이 하나도 없어진다. 이 과정 중에 써도 괜찮고, 그 이전에 이미 쓰고 있었어도 괜찮다. 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 한자씩 적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중요한 건 이제로부터 언제든지 나는 바람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다시 한번 진실로서 인정하는 그 순간 나는 나를 더욱 깊어진 사람으로 만들어간다.
오늘의 글은 이보다 더욱 길어질 필요가 없다. 억지로 늘리지 않으려 한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지나온 글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나로 곱씹을 필요가 있다. 그대의 글을 응원한다. 내가 그대의 글을 읽는다면, 그대는 내게 찾아온 바람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 훗날의 대화를 기대하는 사람으로 그대에게 남겨지려 한다.
내가 건넨 이 글을 마음에 품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외로워 하는 한 작가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