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글 쓰기
윤색을 거치기 전에 인식하고 뱉어낸다. 글이란 그렇게 쓴다. 이때에 나는 귀를 막던 이어폰을 뽑는다. 문명의 이기인지 간편한 소음제거는 오히려 세상과 나를 단절시켰다. 이 시간을 나는 그저 지나칠 뿐이고, 이 공간은 더 이상 나와 아무런 인연이 없는 자리가 된다. 그래서 적어도 글을 쓰고자 할 때에는 혹은 깊은 생각에 잠기고 싶은 날에는 귀를 열고 소리를 온전히 내 안에 통과시킨다. 이 공간의 감각이 내 안을 관통해 지나갈 때라야 비로소 내가 그곳에 살아있었노라 말할 수 있다. 삶이란 결국 관계를 말하기 때문이다.
창공에는 상시로 바람이 분다는 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보던 저 구름을 이 하늘에서 저 하늘로 옮겨가는 바람은 나의 세상에 들어온 무언가가 된다. 관찰을 하는 중 내가 이름을 지어주고, 그 짧은 인과에도 서사를 만든다면 비로소 그것은 이야기가 되며, 살아있는 대상이 된다.
이때는 조금 더 본능적인 인식법에 중점을 둔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저것이 그저 하고 싶은 대로 모양을 만들어 가는 일을 감상하고 싶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움직이는 그대로, 그 모습을 그대로 관찰한다. 내 안에 이것이 명료하게 맺히지 않아도 좋다. 그저 들어오는 대로 내뱉고 다시 들이쉬면서 내 안을 가득 채운다. 어느새 나의 호흡이 되어있을 만큼, 어느덧 내 몸의 관을 타고 흐를 만큼.
그러나 아직 그 안에 뛰어들지 않고 서로의 자리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만을 수용한다. 여전히 조금을 선을 지키면서 대상과 나는 하나가 되지 않는 채로 있다. 글의 시작이라 하기엔 미완된 과정이기 때문이며, 무엇을 말하기에는 여전히 먼 까닭이다. 그래도 괜찮다. 아직은 지금 이 거리감이 알맞다. 나를 잃지 않고 또한 너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씩 관심이 생기고, 건네고 싶은 말이 생긴다. 언젠가 떠날 구름을 위해서. 어느새인가는 내가 알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져있을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조금씩 즉각적인 반응을 꺼내둔다. 꺼내고 꺼낼수록 이 언어는 내 안에서 윤색될 터다. 이다음 단계는 아직 멀었지만, 내 시선은 조금씩 하늘에서 땅으로, 시간에서 공간으로 옮겨온다. 날과 날이 바뀌는 그 어느 현상이 아니라 내가 걷는 시간대의 구체적인 사건을 말하게 될 때쯤 한 걸음을 더 띄며 조금씩 다가갈 예정이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도 괜찮다. 내일도 어려워도 나는 더 기다릴 것이다. 기다림은 어렵지 않다. 내가 기다림 속에 머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미 나와 상관있는 존재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기다림은 관계의 일환이며, 때로는 짙은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기다림은 사랑의 언어로 사용된다. 기다림은 내 마음에 맞추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박자로 지휘하지 않고, 서로의 선율과 선율이 그저 화음을 만들고 긴장을 만드는 일을 즐겁게 여겨줄 수 있을 때를 기대하는 까닭이다. 그렇다. 관계는 기대를 품는다.
글은 나의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를 만들어온 관계와 내가 잡아낼 수 없는 수많은 의식과 무의식을 허우적대며 잡히는 대로 조금씩 끄집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이는 동적으로 시작하여 정적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많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글은 달디 단 정수를 짜낸다. 한 사건과 한 사람으로부터...
글을 세상을 만들며, 내가 여전히 다 알지 못하는 내 내면의 세계를 내가 맺는 관계의 방식과 양상을 통해 구체화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랑은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것이다. 추상적이며 구체적인 것. 때로는 대상과 행동이 존재하는 그것을 우리는 인격이요 마음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깊은 경외를 가지고 시선을 담았다면, 이제는 눈을 마주하며, 그 눈동자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다. 준비가 됐다면, 다음 글로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