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여름 그 사이의 어느 날입니다. 초여름 혹은 늦봄이라 부르기도 하는 이 애매한 시기는 이름의 혼용만큼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 계절 어간을 유독 좋아하는 이유는 오감 활성화되는 한 달 남짓의 기간이라 그렇습니다. 때로는 얇은 외투를 걸치기도 하고, 때로는 더워서 반팔 하나 입고 가로수길 아래를 거닐기도 합니다. 비가 내리기도 하고, 이른 뙤약볕에 타면서 하늘의 풍성함을 만끽합니다. 과장스럽지만 만감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가만히 살아내기만 해도 이 땅 위에서 누릴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 시기에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영감이 저를 가득 채웁니다. 밀려드는 감각을 되새김질하려면 제 머리는 바쁘게 일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는 여가라지만 제 영혼은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피곤함을 느끼진 않습니다. 어미새가 먹이 주듯 저는 자연의 가득함을 그저 받아먹기만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제 마음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지극히 일부라도 언어로 낚아채 한 줄 글로 적어 내려 갈 뿐입니다. 저절로 글이 써지는 오늘보다 글쓰기에 좋은 날이 있을까요?
한참을 삭막해지기 이전에 마음의 양식을 먹는 가을이 지나고 한해에 그러모은 감정들을 소화하고, 정리하는 겨울에는 길고 담백한 수필을 적기에 좋은 계절입니다. 결핍이 있다면 있는 대로 사람은 보이지 않는 가치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봄과 여름은 어떨까요? 한참을 비워내고 정돈한 마음속에 다시 어지러운 꽃향기가 밀려들어옵니다. 그래서 지금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쏟아지는 감동의 물줄기를 하나 부여잡는 계절입니다. 긴 한 해가 끝나면 봄과 가을보다 길고 긴 겨울에서 퇴고하면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집필을 잊고 살았다면, 오늘을 기회로 다시 한번 글을 써보는 게 어떨까요? 머리를 부여잡고 창작의 고통에 몸서리치지 않아도, 지금 느끼는 내 감정을 가장 솔직한 마음으로 쓰면 됩니다. 그것은 맛과 감촉과 향기가 색감과 눈부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시적일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정갈하거나 구체적일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먼저 된 글자 하나면 충분합니다. 혹은 형태소나 음운만 겨우 나올지라도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전부를 묶어둘 수 없지만, 내가 기억으로 붙잡을 수 있는 것들만 읊조리면 됩니다. 그리 거창할 필요도 없고, 너무 대충 한다고 소침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 그 마음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 그 하나면 충분합니다.
자연이 회복을 말하며, 꽃가루와 향기를 뿌립니다. 늦비가 내려 갈급한 땅이 생명줄을 부여잡습니다. 지금은 우리네의 마음도 이와 같기를 바랍니다. 시기의 늦고 이른 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그저 시작하기만 하면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