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규츠비 Jun 04. 2023

[기러기 남편의 난임일기 2]

오이구와 태몽

2023.06.04


5월 26일 난자 채취 후 '느낌이 좋다 오빠야!' 라며 문자를 보냈던 아내.

그리고 지난 월요일인 5월 29일에 시험관에서 배양한 배아 3개를 시험관 아기 시술을 통해 이식했다.

아내는 시술 전 대기실에서 시술복으로 갈아입은 후 스쿼트를 하며 대기했다. 갑자기 스쿼트? 내 물음에 아내는 스쿼트를 하면 자궁에 피가 돌아서 도움이 된다고 난임 클리닉 동기들이 모인 단톡방에서 추천받았다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아무리 내 아내지만 너무 귀엽자냐..'




채취는 수면 마취를 하고 진행하지만, 이식은 마취 없이 진행한다. 총 8개를 채취했었고, 성숙 난자가 5개, 성숙 직전 난자가 3개였는데, 배양 후 최상급 판정을 받은 3개의 배아를 이식했다. 2개 더 수정이 됐지만 동결 가능한 배아가 될지는 아직 모른다. 나이가 차서 이번 시술부터는 배아 3개를 이식할 수 있는 자격(?)이 되어 지난 시술들보다 1개를 더 넣은데다, 등급도 최상급이라고 하니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매사에 긍정적인 나와는 달리 영화 스파이더맨에 나온 젠다야(MJ)의 대사처럼 기대를 하지 않아야, 언제나 최악을 예상하고 있어야 실패했을 때 실망도 덜한 법이라는 생각을 갖고 사는데, 이번엔 기대를 하고 있는 듯하다.


'하늘이시여. 부디 저희 아내가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시 무너지지 않도록, 이토록 간절히 바라는 아이를 저희 부부에게 선물해 주시옵소서.'




'오이구 아빠'


응? 난 아내가 장인어른을 지칭하며 '으이구'라고 말하는 줄 알았다. 아빠 왜?라는 내 물음에 '아니 오빠가 오이구 아빠라고.'라고 대답하는 아내. 5월 29일에 배아 3개를 이식해서 배아 하나에 숫자 5, 2, 9라는 이름을 붙여 '오이구'라고 불렀고, 내가 그 오이구의 아빠라는 말이란다. 게다가 줄이면 '오(이구 아)빠'란다.


'자꾸 이렇게 귀여울 거야?'


아내가 보내온 오와 이와 구의 배아 사진은 지난해 우리 부부에게 찾아왔던 태아 '꼬미(태명)'를 이식할 때 이식했던 2개의 배아 중 이쁜 배아의 상태를 닮아있었다. 배아 세포도 이쁘고 못생긴 게 있다. (외모지상주의 아닙니다.) 꼬미 때의 배아 사진을 보면 병원에서도 이쁜 세포가 A등급, 비교적 못난 세포가 B등급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오이구 배아 사진에는 등급이 보이진 않지만, 병원이 최상급이라고 했으니 그냥 그런 줄로 믿고 있다. 비록 꼬미는 9주만에 하늘로 돌아갔지만, 이번엔 세상에 태어나 빛을 볼 수 있는 아이가 생기기를 간절히 바란다.


꼬미 배아사진 1 (못생긴 배아세포 예시)
꼬미 배아사진 2 (이쁜 배아세포 예시)
이번에 이식한 '오이구' 배아세포들 사진




어제 (6월 3일) 아내와 잠들기 전 통화를 하는데 아내가 나에게 물었다. '오빠 이번엔 태몽 안 꿔?' 하고. 그랬다. 꼬미 이전에 착상이 되었다가 실패했을 때도, 또 꼬미가 착상이 되었을 때도 태몽은 내가 꿨다. '나 아직 안 꿨는데.. 꿨는데 기억이 안 나는 건가?' 그럴 리 없단다. 자고로 태몽은 '내가 태몽이다.'라고 존재감을 뽐낸다고 한다. 누가 꾸든 '아 이게 태몽이구나.'라고 할 정도로 분명하게 감이 온단다.


그리고 오늘이 밝았다. 잠을 조금 설쳤는데, 일어나서 막바로는 꿈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런데 샤워를 하다가 기억이 되살아났다. 오늘 꿨다. 태몽을. 꿀 때 '어! 이거 태몽이다!'라고 생각한 것이 기억났다. 그리고 그 꿈의 이미지가, 아니 영상이 내 머릿속에 위치한 '즐겨찾는 기억 저장소'에 고스란히 저장되었다. 아내에게 기쁜 마음으로 문자를 했다. 아내는 이번에도 내 꿈이 태몽이길 바란다고 하면서도 정확한 꿈 내용은 스포 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방어기제가 작용한 것일까? 아내의 스포금지 통보에 이 난임일기에 태몽 이미지를 AI 이미지 생성툴로 그려서 삽입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나다.


'난 참 말 잘 들어.'




오늘도 난 어김없이 확언을 되뇐다. 내년 초엔 우리 아이가 태어나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와 함께 셋이 오붓하게 한 집에서 살아가는 장면을 그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러기 남편의 난임일기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