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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의미

H의 이야기

by 박이운


9월의 어느 날 북천역 승강장에 선 H는 아직 그리 쌀쌀한 날씨가 아님에도 괜시리 한기가 느껴져 코트를 여몄다. 코트 주머니에선 A에게 차마 건네지 못한 편지와 반지가 나뒹굴었다. 이번엔 꼭 마음을 전하겠노라 다짐하고 한달음에 내려왔지만, A를 보는 순간 그 다짐은 아무 소용이 없게 되어버렸다.


A는 모든 것을 버리고 가족도 친구도 남아있지 않은 고향에 내려와 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뒷모습에선 어렴풋이 쓸쓸함이 묻어나왔다. 분명 편지를 쓰고 내려오기까지 수없이 다짐을 했던 H였지만, 편지는 커녕 다가가 인사 조차 꺼낼 수 없었다. 편지에 써놓은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진심어린 약속들도 모두 지키지 못할 약속들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렵사리 떨쳐냈던 죄책감이 다시금 꼿꼿이 서서 자신을 내려보는 것만 같아 고개를 떨궜다. 진심을 전하면 손에 잡힐 것만 같은 A였는데, 결국 풀어내지 못한 수수께끼를 마주친 것처럼 다시 길을 잃고 말았다. 답이 있긴 했던 걸까.


그렇게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고개를 떨구길 여러번, 결국 H는 발을 돌렸다. 표를 사는내내 목소리가 떨렸다. 매표소 직원이 잠시 이상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다행히 아무것도 묻지 않고 표를 내주어 눈물을 쏟지 않았다. 역장의 눈인사도 무시한채 승강장에 들어선 H의 시야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다들 코스모스 꽃놀이를 나온 모양이다. 즐거운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으로 바람이 살며시 불어와 H의 코끝에 코스모스 향기를 가져다 주었다. A의 향기 같았다.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져 눈물을 참고자 고개를 드니 구름마저 풍성하고 예쁜 뭉게구름이다. 아름다운 것을 아릅답다 느끼지만, 아름다움 이면에 슬픔이 겹쳤다. 사랑스러운 모든 것이 A를 향했다. A와 손잡고 해외로 여행을 다니던 시절, 그녀는 유독 발 밑에 깔린 구름을 보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솜사탕이 아닐까, 뛰어올라 볼까' 지나간 유행가 가사를 흥얼거리며 행복해 했던 날들. 모든 것은 그렇게 추억이 되고 말 터였다.


H는 떠나기 싫었다. 기차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길 바랐다. A의 의미를 더 깊이 새기고 싶었다. 하지만 H를 제외하고는 모든게 아무런 문제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기차도 예외는 아니었다. H는 자신도 모르는 새 되뇌어지는 노랫말을 곱씹으며, 그렇게 등 떠밀리듯 북천역을 떠났다.


'나 이제 뭉게구름 위에 성을 짓고

널 향해 창을 내리 바람 드는 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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