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샤쓰 입은 사나이

어둠 속 내딛는 한 걸음, 빛을 향하다

by 박이운

"노오란 샤쓰 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 어쩐지 나는 좋아, 어쩐지 맘에 들어."


지난 2025년 1월 22일 타계하신 원로 가수 고 한명숙 님의 대표곡,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의 도입부 가사다.

갑자기 이 노래가 떠오른 이유는,

오늘 새벽 러닝 중에 마주친

분홍색 싱글렛을 입은 사나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나와 반대편에서,

같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내가 살짝 뒤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나를 보지 못했지만,

나는 곁눈질로 계속 그를 바라보며 달렸다.


호리호리한 몸,

살짝 앞으로 굽은 목,

경쾌한 풋워크와 팔 스윙.

딱 봐도 나 같은 런린이와는 차원이 다른 러너였다.


그리고 곧 내 시선은 그의 케이던스로 향했다.

1km 구간을 지나 180 bpm에 맞춰 달리던 나는,

이미 내 한계 케이던스에 맞춰 보폭을 많이 줄여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곁눈질로 확인한 그의 케이던스가 나와 엇비슷했다.


“어? 이대로 반환점까지 쭉 같이 뛸 수 있겠는걸?”


하지만 이 생각이 무너지는 데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케이던스는 비슷했으나,

그의 속도는 감히 내가 따라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런린이는 오늘도,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고 겸손을 배운다.


반환점에 가까워지는 순간, 나는 다시 한번 그를 찾았다.

내 러닝 코스 반환점에서 우회전해 사라져 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저 러너도 나처럼 처음 뛰기 시작한 시절이 있었겠지.

그땐 저 사람도 지금의 나처럼 조금은 느린 페이스로 천천히 달렸겠지.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여 지금처럼 잘 뛰는 러너가 되었겠지.


나도 그럴 수 있겠지?

지금은 저 사람처럼 뛴다는 것이 상상조차 되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을 것만 같아도,

지금처럼 꾸준히 달려간다면

나도 모르는 새 지금의 나와 비슷한 레벨의 러너가 봤을 때 '잘 뛴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러닝도, 인생도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법은 없다.

노자가 말했다.

“한 아름의 나무도 티끌만 한 씨에서 생기고,

아홉 층의 높은 탑도 흙을 쌓아서 올렸으며,

천 리 길도 발밑에서 시작된다.”


나는 달리며 꿈을 꾼다.

매일 새벽 내딛는 나의 발걸음으로

도토리 씨앗을 심어 한 아름의 참나무가 되길,

내 가족을 온전히 품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길 꿈꾼다.


오늘도 난,

그렇게 한 뼘,

성장했다.


- 오늘도 진짜 나를 향해, Run To Real -

by 규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