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해도 안 되는 날이 있다. 신호에 번번이 걸리는 출근길부터 실수를 연발하는 업무, 그리고 사람들과의 사소한 갈등. 때로는 이 모든 일들이 하루에 겹쳐서 일어난다. 대게 이런 날에는 집에 일찍 귀가하는 편이다.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산책을 하거나 커피를 마시는 등 짧은 휴식이 필요했다.
수술방도 '뭘 해도 안 되는 날'의 예외 장소는 아니었다.
지난달 혈과 외과 파트 마지막 수술이었다. 혈과 외과의 가장 큰 수술 중 하나인 복부 대동맥류 수술에 들어갔다. 본원 교수님들은 이 수술을 보통 3-4시간 정도면 끝내신다. 특별히 어려운 상황이 없다면 수술 전후 마취 과정을 포함해도 환자는 오전에 들어가서 점심쯤 나온다. 하지만 이날의 복부 대동맥류 수술은 점심을 지나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끝났다.
평소 좋아하던 펠로우 선생님, 그리고 비교적 어려운 교수님과 함께였다. 한 달간 매일을 봐온 탓에 교수님의 옆자리도 처음보단 편했다. 중간중간 모르는 걸 물어가며 순조롭게 진행되나 싶었다. 하지만 중간부터 조금씩 예상 시나리오와 어긋나는 일들이 생겨났다. 예상보다 막혀있는 혈관의 길이가 길었고, 예상보다 스텐트의 길이가 짧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피가 났고, 예상치 못한 환자의 소변량 감소는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좁고 깊은 뱃속은 시야를 더욱 제한했다. 어느덧 수술 시간은 6시간이 훌쩍 지났다. 순간 이 수술이 끝이 날까란 의문이 들었다. 구역감이 올라올 만큼 현기증이 일었다. 출구가 없는 미로를 헤매는 느낌이었다. 교수님조차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다른 교수님들이었으면 이미 몇 번의 고성이 나오고도 남았다. 수술이 아닌 다른 일이었다면 잠깐 멈추고 싶었다. 잠깐 화장실이라도 다녀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뭘 해도 안 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수술이 진행되었다. 한껏 예민한 남자 셋이서 6-7시간을 머리를 부딪히며 좁은 환자의 뱃속을 보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조금씩 정리가 되어갔다. 처음 계획보다 수술 시간이 더 길어지긴 했지만 끝이 보였다. 양측 허벅지 동맥은 잘 뛰었고, 이제는 마무리만 하면 되었다. 보통 마무리는 어시스턴트가 한다. 교수님이 나가고 어시스턴트는 아직 조금씩 흐르는 피를 잡고, 피부를 봉합한다. 말은 '마무리'라고 하지만 이 과정도 무시 못한다. 지혈제를 뿌리고, 배를 닫고, 환자를 깨우는데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은 걸린다. 이날의 교수님은 평소와 다르게 마무리까지 함께하셨다. 본인이 나가면 훨씬 더 오래 걸릴 것이란 걸 알고 계셨다. 평소 좋아하고 존경하는 교수님이었지만 마지막까지 바늘을 뜨고 나가시는 모습은 교수님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었다. 아침 8시에 시작한 수술은 오후 5시가 되어서야 끝이났다.
수술방에서 계획되지 않은 일은 수술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이다. 비교적 책임이 자유로운 어시스트조차도 힘들다. 본인의 이름을 걸고 수술하시는 교수님의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사람의 힘듦까지 생각해 주는 인품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순간 교수님의 성품이 그대로 가지고 오고 싶을 만큼 부러웠다. 최근 '올바름'에 관련한 글을 썼다. 내게 올바른 선택이란 이런 것이었다. 힘들고 귀찮더라도 그 순간에서조차 타인을 생각한 선택이었다. 마음 대신 몸이 불편한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그 사람을 위대하게 만든다.
돌아보니 숨 막히는 수술도 결국 끝은 났다. 인생의 숨 막힐 것 같은 순간들도 언젠가 끝나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순간들을 통해 조금씩 배우고 성장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