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전공의 Aug 23. 2022

왜 의사들은 항상 어려운 의학용어를 쓰며 얘기할까?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진료실 의사 선생님이 쓰는 글씨는 알아볼 수 없었다. 진료 차트에는 한글과 영어가 뒤섞여 있었다. 필기체처럼 보이는 단어는 해석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요즘에는 대부분 진료 기록이 전산화되어 손으로 진료 차트를 작성하는 곳은 거의 없긴 하다. 만약 아직 수기로 진료 차트를 작성하는 병원을 간다면, 그 병원 원장님은 정말 경력이 많으신 분일 것이다.


의학 드라마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의학 드라마의 화면 아래에는 항상 용어를 설명하는 각주가 들어간다. 의료진들끼리 하는 대화는 가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 때도 있다.


왜 의사들은 항상 어려운 의학용어를 쓰며 얘기할까?

첫 번째는 익숙함이다.


의과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가장 먼저 배운다. 타 의과대학은 모르지만, 내가 다녔던 의과대학은 본과에 입학하기 전 의학용어 강의가 따로 있었다. 단순 해부학 용어부터, 증상을 표현하는 단어, 질병 이름 등 의학용어들을 스치듯 빠르게 배웠다. 물론 1학기 동안 의학용어 수업을 들었다고 해서 본과 수업이 원활하지는 않았다. 처음 보는 단어들은 항상 있었고, 의학용어가 입에 붙는 과정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강의실 수업을 벗어나 병원 실습을 하며 여러 파트의 컨퍼런스에 참여했다. 알아듣진 못하였지만 컨퍼런스에서 교수님들과 선배들이 의학용어를 쓰며 나누는 대화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누적된 경험에 하나둘씩 알아듣는 의학용어들이 생겼고, 동기들끼리 일부러 의학용어를 쓰기도 했다. 그냥 어지럽다고 하면 될 걸 '아까부터 dizziness가 있어.' 이런 식이었다. 그땐 왜 그랬나 싶지만 이렇게 보고, 듣고, 자주 쓰면서 마치 하나의 언어를 배우듯 의학용어가 자연스럽게 몸에 뱄다.


의학을 접하고 전공의가 되기까지는 최소한 10년, 교수님이라도 되기까지는 20년이 걸릴 수도 있다. 새로운 언어가 입에 붙고 익숙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두 번째는, 일종의 약속이다.


단어만 보고 이 사람이 어떤 기저 질환이 있는지, 어떤 수술을 받았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 정해진 의학용어로 쓰인 기록은 무엇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준다. 환자는 살면서 한 명의 의사만 만나지 않는다. 특히나 한국처럼 병원 접근성이 뛰어난 곳은 살면서 수십, 수백 명의 의사를 만날 수도 있다. 진료 시엔 이전 병원에서 가지고 온 기록을 가지고 환자를 파악한다. 이때 부정확한 표현이나 용어들은 진위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진료를 몇 배는 더 힘들게 한다.



세 번째는, 간편함 또는 간결함이다.


환자의 상태를 타 의료진과 공유할 때는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 다들 바쁜 사람이다 보니 간결하고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복통 환자의 신체 진찰 중 가장 기본적인 진찰이 Tenderness, Rebound Tenderness이다. 대부분의 의료진에게 "환자 RUQ Tenderenss는 있고, Rebound Tenderenss는 없습니다."라고 얘기하면 바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용어들이 없으면 "환자 오른쪽 상부 사분면 배를 눌렀을 때 아파하고, 눌렀다가 빠르게 땔 때는 아파하는 증상이 없습니다."라고 훨씬 장황하게 묘사해야 한다. 정해진 의학용어들로 정보전달이 더 간결해지고 간편해질 수 있다.



마지막은, 프로페셔널함이다.


병원에서 의학용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한다는 건 그만큼 용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음을 의미한다. 많은 환자를 보고, 많이 공부를 했을 때 익숙해지는 의학용어들이 더 많아진다. 특히 교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는 내공이 느껴진다. 가끔 나의 무지를 감추기 위해 회진 시에 모르는 의학용어에도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일 때도 있었다. 그러곤 회진이 끝나고 다시 그 단어를 찾아봤다.


어떤 교수님의 말씀으로는 '의학은 terminology(전문용어)의 학문이어서 단어가 중요하다.'라고 하셨다. 지식이 무기이고, 무지가 위해가 될 수 있는 의료계에선 프로페셔널함은 필수다.




아무것도 몰랐던 학생 때는 괜한 의대생이라는 자부심에 일부러 의학용어를 사용했다. 원래 모를수록 허풍이 심한 법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일한 지 어느덧 3년 째인 지금은 오히려 의학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환자들에게는 쉬운 말이 최고다. 하지만 너무 입에 붙어버린 탓에 대체할 용어가 떠오르지 않아 가끔은 환자 앞에서 더듬거린다. 아니면 무심코 영어를 내뱉은 후 다시 정정하기도 한다. 특히 진단서를 쓸 때 의학용어의 한글 버전 구글 검색은 필수다.


한없이 깊어야 할 의학의 전문성과,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되어야 할 의학의 대중성.

그 간극을 메우는 일은 환자를 만나는 동안 꾸준히 풀어야 할 숙제인 듯하다.


(한 가지 오해가 있다면, 영어 의학용어를 많이 쓴다고 해서 모든 의사가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니다.:)




알아두면 좋은 병원 상식 시리즈는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communication quality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병원 사람들에겐 익숙하지만 병원 밖 사람들에게는 낯선 병원 상식을 연재합니다. 또 다른 궁금증이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


매거진의 이전글 왜 대학병원 응급실 진료는 오래 걸릴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