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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전공의 Feb 18. 2023

6. 3월에 대학 병원을 가면 안 되는 이유


대학병원의 3월은 격동의 시기이다. 새로운 인턴, 새로운 레지던트, 새로운 주니어 스텝. 한 해 동안 본인의 자리를 맡아오던 의료의 구성이 한꺼번에 바뀐다. 오랜 기간 병원 일을 하셨던 교수님들은 그 변화의 정도가 덜하다. 단지 업무 환경과 환자군이 달라지는 정도이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전공의의 신분 변화’이다. 덕분에 3월의 대학병원 입원을 피하란 것이 의료계의 불문율이기도 하다.


인턴과 레지던트의 신분 변화는 병원에서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학생 -> 인턴
학생 실습 기간의 홍도와 윤복이

말 그대로 가장 급격한 신분 변화이다. 병원에 등록금을 내던 '학생'에서, 병원의 월급을 받는 '노동자'로 변신한다. ‘남의 돈 받기 쉽지 않다.’라는 사실은 돈을 벌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아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3월 인턴은 '남의 돈'을 받기까지 정말 혹독한 적응의 과정을 거친다. 동맥혈 채혈, 심전도 검사, 소변줄, 비위관 삽입, 동의서 등 처음이 너무나 많다. 학생 시절 글로 읽고, 영상으로 보기만 했던 의료 행위를 직접 환자에게 행해야 한다. 처음은 누구나 서툴 듯 인턴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환자들이다. 인턴이 인턴 업무에 적응하는 동안 환자도 같이 인내와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동맥혈 채혈은 보통 환자의 손목에 주삿바늘을 찌른다. 익숙해지면 10초가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해보면 지금 느껴지는 이 동맥이 환자의 맥박인지, 긴장한 본인의 맥박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엄한 곳에 여러 번 주삿바늘을 찌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30분째 피를 한 방울도 채혈 못하는 경우도 있다. 나 또한 겪었던 실제 경험이다. 1-2cc 채혈하는데 온갖 용을 다 쓴다. 여러 번 찔리면서 화를 잔뜩 내는 환자분 앞에선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다.


웃픈 해프닝들도 있다. 인턴 업무를 가장 정석대로 하는 기간이 이 기간이기도 하다. 한 동료는 소변줄을 넣는데 20분씩 소요되었다. 원래 요도 입구 정도만 소독하고 카테터 삽입 후 고정하는데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일이다. 알고 보니 의대 교육 동영상에서 배운 정석대로 술기를 했었다. 환자의 생식기 근처뿐만 아니라 회음부를 포함하여 아랫배까지 넓게 소독하고, 소독액이 마르는 시간까지 기다린 뒤 소변줄을 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사이 환자는 바지를 내린 채 아직 쌀쌀한 3월에 한참 허전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한가득이지만 해프닝 하나만 더 언급하자면, 브라질리언 왁싱이다. 보통 혈관 조영 시술을 할 때는 허벅지 근처 큰 혈관을 찌른다. 시술 시에 균이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술 부위 근처 제모가 필요하다. 이 제모 또한 인턴 업무이다. 바늘이 들어가는 곳 근처만 제모를 해주면 되지만, 지식이 없던 인턴 시절엔 털은 없을수록 오염 리스크가 적다고 판단했다. 덕분에 일흔 살의 할아버지도 브라질리언 왁싱을 받곤 시술에 들어갔다. 이렇게까지 밀어야 하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균 들어가 가면 큰일 난다.'라며 열정적으로 제모를 했던 시절도 있었다.



인턴 -> 레지던트
커피는 필수인 인턴 홍도와 윤복이

인턴과 레지던트의 업무 영역은 아예 다르다. 인턴 업무를 주로 레지던트가 처방한다. 2월 28일까지 인턴 신분으로 처방된 업무를 하다가, 3월 1일 날짜로 인턴 업무를 처방하는 사람으로 입장이 바뀐다. 분명 어제까지 처방에 관련해선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하루 만에 수십 명의 환자를 책임져야 하는 주치의가 된다.


주치의는 환자의 입원부터 퇴원까지 환자의 처방을 책임진다. 얼마나 굶길지, 어떤 진통제를 줄지, 퇴원을 시켜도 될지. 책임져야 할 일도 많고 그만큼 부담감도 상당하다. 아직도 2021년 3월을 떠올리면 숨이 턱턱 막힌다. 첫 출근 날엔 밤 10시가 넘어도 퇴근을 못했다. 실수를 하면 윗년차 선생님이 정정해 주시긴 했지만, 실수를 '할까 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은 병동 일을 더욱 느리게 만들었다. 덕분에 환자들의 기다리는 시간도 상당했다. 퇴원 처방 하나를 못내 쩔쩔매던 1년 차 덕분에, 오전 내내 영문도 모른 채 오매불망 퇴원을 기다리던 경우도 있었다.


사실 처방을 낸다는 것은 책임을 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책임을 질 역량이 못 되는 3월의 레지던트에게 처방은 너무 버거운 짐이다. 지식과 책임질 자신이 없으니 윗년차 선생님, 교수님께 컨펌을 받아야 했다. 회사에서도 그렇듯 일은 위로 올라갈수록 답변이 되돌아오는 시간은 상당하다.





한 해에 졸업하는 의대생은 3000명 정도이다. 그리고 한 해 인턴을 모집하는 병원은 195 곳. 올해는 총 3200명의 인턴을 모집했다. 일부 병원에서는 인턴 정원을 충족하지 못하는 곳도 있다. 미숙한 인턴이라도 있는 병원은 그나마 다행이다. 비교적 채용 기간이 유연한 일반 회사들과는 다르게 대학 병원의 의사 채용은 3월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머지 달에는 뽑더라도 특정 사유로 공석을 대체하는 정도이다. 새 학기 같은 3가끔 병원이 대학의 연장선상처럼 느껴지게 만들기도 한다.


가장 실수가 많고 허둥지둥하는 3월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가장 열심히 환자를 보는 달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환자와 가장 많은 대화를 한 기간이 인턴, 레지던트 1년 차 3월이었다. 그리고 가장 바쁘게 병동을 돌아다닌 시기였기도 했다. 한 교수님은 3월 마음가짐으로 의사를 계속한다면 의사가 될 거라고 다. 실제로 아직까지 얼굴이 떠오르고, 라포가 좋았던 환자들도 3월의 담당 환자들이다.


누군가는 3월이 모두가 초보인 아수라장이라 표현했다. 하지만 아수라장 속에서도 20, 30대의 초보 의사들은 성장하고, 미숙함을 대체할 만한 열정을 환자들에게 전해준다. 그리고 든든한 선배들 덕분에 3월이라고해서 더 위험한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다만 새로 시작하는 선생님들이 누구나 처음은 있었다는 용기를 가지길 바란다. 헤매는 첫 한 달이 분명 성장에 든든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분들도 3월의 초보 의사 선생님들을 너그러이 봐주시길.


알아두면 좋은 병원 상식 시리즈는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communication quality를 높이기 위함입니다. 병원 사람들에겐 익숙하지만 병원 밖 사람들에게는 낯선 병원 상식을 연재합니다. 또 다른 궁금증이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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