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루저다.
늘 그렇듯이 오늘도 과식이다. 먹는 욕심은 왜 이렇게 많은 건지, 가끔씩 걸신이라도 찾아오는 건지 배가 부른지도 모르고 계속 먹기만 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달려야겠다. 이왕이면, 평소보다 많이 달려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제법 봄을 알리는 할머니들의 호홍호홍하는 웃음소리가 창문을 넘어 들어온다. 저 정도 웃음소리면, 오늘은 반바지를 입어도 괜찮겠다.
평소 5~10km 사이의 거리를 달린다. 무릎을 아끼고, 시간을 아낀다는 핑계로 적당히 한 시간 안쪽으로 달린다. 그런데 오늘은 굳이 또 15km를 달려보고 싶다. 늘 마음먹고 달리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것이 일수인데, 아마 오늘도 그러려나보다. 늘 나는 마음먹은 것을 끝까지 해내지 않으니 말이다.
달리기 전, 커피를 마시면서 가만히 생각해본다. "나는 왜 늘 목표한 만큼 이루지 못하고, 중간에 스스로 이 정도면 됐어!라는 마음으로 만족하며, 그만두는 걸까?" 평소 달리기를 할 때, 목적지를 정해두고 달리지 않는다. 무작정 달리다가 처음 보는 골목이 있으면 그리로 달려보고, 무언가 매력적인 건물이 보이면 그쪽으로 향하는 편이다. 그렇게 홀로 쭉 달리다 보면, 어느새 멈추고 싶다. 그러면 보통, 7km 정도 되는 것 같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미리 경로를 설정한다. 매번 계획 없는 경로를 달렸다면, 오늘은 큰 그림을 그려보고, 그 흐름대로 달려보는 것이다. 여의도에서 반포 쪽으로 달려 잠수교를 통과해 이촌동으로 나온다. 그리고 집까지 달려가는 것이 계획이다.
역시나, 8km 지점을 지나니 멈추고 싶다. 나를 앞질러 달리는 저 남자가 얄밉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멈추면 집까지 가는 길과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걸린다. 달린다. 오늘은 그냥 한 번 해본다. 한강을 벗어나 도로로 나오니, 따릉이부터 버스까지 수많은 유혹이 나를 웃게 만든다.
안된다.
참는다.
달린다.
해보자.
할 수 있다.
를 수없이 뱉는다. 멈추고 싶을 때마다 또박또박 뱉는다.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목표했던 15km를 넘어 18km를 달렸다.
솔직히 중간에 멈춰도 좋다는 나약한 마음이 자꾸 찾아왔다. 내가 마라토너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까지 달릴 필요는 없다고 말이다. 근데, 이 거지 같은 굴레의 연속을 끊어버리고 싶었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늘 처음 목표했던 것을 이뤄내지 못하는 자신을 그만 좀 보고 싶었다고 해야 하나?
요즘, 계속 작업에 작업, 개인적으로 몰두하는 일이 있다. 유독 오늘 아침부터 오후까지 일이 풀리지 않았다. 일이 안 풀리니, 닭강정이 먹고 싶고, 햄버거도 먹고 싶다. 배가 불러오니, 뇌는 불어버린 라면처럼 통통해진 듯하다. 작업에 집중할 틈조차 없이 팽창한 것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달리기로 마음먹었고, 이것만큼은 내가 원하는 만큼 오래 달려보고 싶다. 그래서 평소와 다르게 끝장을 보고 싶었다. 늘 보지 못 했던 그놈의 끝장.
오늘 이 성취는 단순한 의지로 이뤄낸 것이 아닌, 평소 하지 않았던 계획을 통해 이런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사실, 문제는 늘 내게 있었다. 정확한 목적지가 없다면, 언제라도 멈춰도 좋은 상황인 내가 단순히 의지로만 15km 이상을 달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계획은 분명 필요한 것이었다. 이 작은 성취는 집에 돌아와 남은 작업까지 마무리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준다. 작은 성취를 쌓아가며 나 아가다 보면, 꽤 큰 성취도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상하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자신감이 꽤나 불어오른다.
마치 ‘작은 성취를 쌓아가며 사는 삶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