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산만함에 대한 이야기
이게 나의 서울 D 초등학교 6학년 3반, 할아버지 선생님이 쓴 통지표.
부모가 되고 나니 새로운 시선도 보인다. 이걸 전달받은 엄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명랑했으면 됐다 하셨을까나. 누군가는 선생님이 너무하셨다고도 했다. 선생님은 귀찮으셨던 걸까? 아니, 저렇게 연필로 자를 대고 선을 그을 정도의 정성이었다면 귀찮아서 저렇게 쓰신 건 아니실 테야.
나도 나를 기억한다. 왈가닥, 천방지축, 소란스러웠고 어쩌다 고요한 순간조차 산만했다. 늘 두리번거렸고, 골목을 날 뛰느라 새로 산 옷이 튀어나온 못에 걸려 부-욱! 하고 찢기던 소리도 생생하고, 신발 고무 밑창이 떨어져 나가 본드로 몇 번을 칠해 신던 발의 불편감도 생각난다. 떡칠된 본드가 더 이상의 접착을 거부하는 그 최후의 때가 되어 신발을 버려도 그 뒤로도 한해에 수 켤레를 사 신었어야 할 정도로 에너지가 넘쳤다. 점점 성장하면서 '오늘의 칭찬은 내 거야' 라며 수업시간에 똘망똘망 집중하기도 했지만, 늘 내 손을 떠나 구천을 떠돌게 되는 나의 물건들로 내 산만함의 끈질긴 생명력은 증명됐다.
'우산 = 잃어버리는 것'은 말해 뭐 해, 이런 나를 이미 간파한 엄마는 모두들 귀여운 도시락 통을 들고 소풍 갈 때 진작부터 일회용 도시락에 엄마표 김밥을 넣어주셨었다. 당시엔 일회용 도시락이 흔치 않았고 소위 일하는 바쁜 엄마를 둔 가여운 아이나 들고 다니는 것이었기에 '얘네 엄마 집에 있는데?' 라며 의아하게 생각했던 친구들의 눈을 기억한다.
서울랜드 코끼리 열차 어딘가에 내 지갑이 떠돌다 누군가에게 갔을 것이고, 롯데월드 어딘가엔 나의 중학교 졸업사진이 담긴 필름 카메라가 떠돌았을 것이다. (그래서 졸업사진이 없다) 고등학교 매점에도 생일선물 받고 첫 개시한 무려 빈폴지갑이 (당시 최고인기) 근처를 떠돌다 누군가에게 갔을 것이고, 대학교 식당의자에 걸쳐뒀던 아끼던 내 검정 카디건도 생각난다. 어느 날은 체육 시간에 운동장 흙바닥에서 내 입안에 있어야 할 치아교정기를 발견한 날도 있었다. 아... 이쯤이면 6학년 3반 선생님이 너무 한 건 아니지.
그래서 이제 곧 마흔, 성인인 나는 내 물건에 대한 집착이 강박적으로 강하다. 하루에도 10번씩 휴대폰/지갑을 잃어버리는 상상을 하며 특히 외출 시 계속 가방을 살피면서 소지품 검사를 한다. 걷다가 멈춰서 가방을 보고, 자리를 잡고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도 다시 또 가방을 열어 원, 투, 쓰리 확인을 한다. 특히 여행 후 잃어버린 게 없다면 그럼 그걸로 된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 전 동생이 이탈리아에서 사 온 Gucci 머플러를 잃어버렸고, 1년 전엔 마사지 샵에서 풀러 두었던 예물 목걸이를 깜박했다가 일주일 뒤에야 깨닫고 연락해서 운 좋게 다시 찾기도 했다.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아이를 안 잃어버리는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중에서도 산만한 자로서 정말 어려운 것 하나, 바로 '정리'다.
한낮의 우리 집은 나 홀로 있어도 생활감이 넘친다. 용도에 맞는 분류 및 라벨링에 따라 적당한 수납 자리가 지정 되어있긴 한데 하루를 지내고 나면 우리 집 물건들이 미녀와 야수의 살아있는 가구들 마냥 제자리에서 다 나와있어 저녁에 다시 도로 집어넣는 일을 해야 한다. 사실 '휘리릭' 정리하면 정말 깔끔할 텐데 그 '휘리릭'! 이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다. 남편은 청소/정리엔 젬병이긴 해도 제자리 본능이 강해 애초에 어지르질 않으니 정리에 참여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아... 원통한 것은 딸내미가 꼭 나를 닮았다. 오 주여...
일단 귀가하면 벗어놓은 옷에 따라 동선 추적이 가능한 것은 애교 수준이지. DVD 한 장을 꺼내기 위해 거실장을 열어두었다가 닫지 아니한 채 여러 장의 DVD가 늘어져 있고, 봤던 DVD는 방에서 주방에서 식탁에서 발견된다. 한번 꺼내면 넣지 않는 패턴이 꼭 그 어미의 자식임을 불필요하게 증명한다. 양치를 돌아다니면서 해서 주의를 줬건만 치약통이 꼭 집안 어딘가에서 발견된다. 무슨 간식을 어디에서 먹었는지, 어디에서 연필을 썼다가 지우개로 지웠는지 등등 모든 흔적을 남긴다.
분리수거를 하려다가 쓰레기를 늘어놓은 채 그 옆에 있는 운동기구를 정비하다가 그냥 두고 자리를 뜬다던가. 요리를 하다 보면 주방이 난리가 나서 카레 하나 끓이는데 두 시간이 걸린다던가 하는... 나 하나 만으로 충분한데 말이다.
그중에 제일 괴로운 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말 계속 치운다는 것이다. 우리 남편은 어지러운 물건들 사이에서도 요리조리 몸을 구겨 잘도 자는데, 나는 꼴에 빳빳하고 포근하며 폭닥한 침대시트를 원한다지. 실제로도 호텔 숙박을 할 때면 처음 그 방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싶어 그렇게 짐정리를 해댄다. 시지프스의 형벌이 따로 없다. 깨끗한 게 좋아! 근데 마! 내가 어지르는 사람이다!
고백하건대 사실 1년 전까지만 해도 남편은 드어럽고 나는 까알꼼하니까 치우는 줄 알았는데 이제 안다. 계속 어지르는 자가 어쩔 수 없이 계속 치우는 것이다. (그렇다고 당신이 깨끗하다는 건 아냐. 오해금물!) 어쩌자고 나는 또 더러운 게 눈에 띄는 능력을 타고났는가. 아무튼 거기에 딸이 가세를 하여 우리는 시지프스 1, 시지프스 2가 되었다. 나와는 조금 다르지만, 얘는 본능적으로 어지르고 내 잔소리를 들으며 계속 치워야 하니까 시지프스 2 맞다.
아, 무엇을 해도 영 마무리가 힘든 자여. 그래도 어찌어찌 한몫을 해내고 살아가고 있으니 이 또한 기적이다. 온 가족이래 봐야 세명뿐이지만 안 치우는 1명과, 끊임없이 어지르는 2명이 복닥거릴 주말이 코앞이다. 혼자 컴퓨터 앞에서 외쳐본다.
명랑한 우리 가족, 부디 평온한 주말이 되길.